"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12일)
어제는 서울 강의를 가는 바람에 <인문 일기>를 업로드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오늘 아침 두 개의 <인문 일기>가 공유된다.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화두를 잡고 싶다. (1)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일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늘 기억하지만, 진짜 죽음을 직면해 보았는가?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나 곁에서 먼저 하늘 나라로 간 아내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2)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 이야기. 제목 만으로 호기심이 생긴다. 신의 콜링?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3)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이건 나도 경험했다.
스승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한다. 글 쓰는 사람은 에고이스트이다. 왜냐하면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된다. '자아'를 통과한 글만이 만인의 심장을 울리기 때문이다.
스승은 암에 걸려 죽을 때까지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면, 암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다.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 알 수 없다. 다만 스승은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방사능 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며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ubker-Ross) 이야기 나온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고 이를 인지하기 까지의 과정을 다음의 5단계로 구분 지었다. "부인(denial)-분노(anger)-협상(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이다. 이를 '죽음의 5단계'라 하지만, '분노의 5단계'라고도 한다. 이 모델은 사람이 죽음과 같은 엄청난 상실을 겪을 때 보이는 심리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다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지.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다.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 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는 거다.
신의 부름은 고통 없는 죽음이 아니다.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것이 신의 콜링이다. 스승은 니체 이야기를 했다. 신이 없다고 한 그도 십 년간 식물인간처럼 살다 죽었다.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다.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 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진다. 마부에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울다가 미쳤다.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다. 그때 니체는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 한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다.
스승은 언어가 틀에 갇히면, 사고도 틀에 갇힌다고 했다. 이 틀을 벗어나려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그게 인문학 적이거나 예술적인 접근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 중국이 두 글자, 또는 사자성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선왕께서 말하기를……이야'라며, 먼저 말한 모델이 있어야 인정해주는 것 때문이다. 내 머리로 생각해야 전혀 다른 앵글이 나온다.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거다. 우리는 의문이 생겨도 의문을 질문으로 꺼내어 표현하는 용기가 부족하다. 민주주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다.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된다.
나는 늘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 그래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사람마다 살아온 경력이 다르니까.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거나 주입하려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니까. 이런 가운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그를 매우 반갑게 생각하고, 그와 음모를 꾸민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 몰래 꾸미는 일)'라고 말했다. 이 음모의 시작은 서로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하며, 뭉클한 위로를 받을 때가 공감하는 순간이다. 음모를 사전에서는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밈 또는 그런 꾀"로 정의하지만, 고 신영복 교수는 음모를 "현실에서 든든한 공감의 진지(陣地)"라고 말하면서, 음모는 우정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정의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변화시키는 힘은, 내가 오늘 아침에 결정한 결심과 그것을 이루려는 연습이다. 그 연습은 내 삶을 어떻게 끌고가야 할지 질문하며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회가 주는 명칭은 나의 군더더기이다. 올해는 시선을 외부에 두지 말고, 나의 내면을 찾는 시간을 많이 가질 예정이다. 잘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발견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평상시 그저 생각하던 습관을 바꿔, 두 번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의 나의 모습에서 관조할 생각이다. 나 자신, 즉 내가 나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는 유일한 자이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 의해 나에게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과 불행은 내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결과이다. 인간은 행위의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막을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을 야기하는 행위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매일 아침 공유하는 시도 블로그로 옮긴다. 시가 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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