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구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11. 10:46

307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1일)

윤이 관저에서 숨어 나오지 않고, 체포 영장을 거부하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세는 기울었다. 한 곳만 무너지면 담 벼락은 스스로 쓰러진다. 세상 사가 다 그렇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본으로 여론을 조작하며, 판을 깨고 다시 복귀하려 애를 쓴다. 우리는 다음 그림과 같은 불면증을 겪고 있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다들 공동체보다 개인의 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1.
내가 이번 사건에서 이해할 수 없고 가슴 아픈 것은 '12·3 비상계엄 사태'에서 윤의 계엄 선포 당시 ‘이것은 국헌문란이며 내란이다’라고 외친 자들이 정부나 여권 내부에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국가 안위를 다루는 국무 위원과 국방을 책임진 최고위 장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명문대와 사관학교 출신 또는 외국 유학을 경험했거나 학생을 가르친 엘리트들이며, 국민 선택을 받은 국회의원을 지냈거나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러나 마비된 판단력으로 전 국민 경전인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국민의 공복을 자처한 자들이 주인을 배반했다.

2. 
더 속상한 것은 우리가 그 후에도 이같이 '전도된 현실'을 목격한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특히 거리의 국민의 힘 현수막들이 속을 터지게 한다. 그리고 국법 파괴자가 오히려 철옹성을 쌓고 법 운운하고 있다. 하수인들은 국격 추락의 원인으로 윤의 체포는 제쳐놓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한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거짓말, 은폐와 왜곡, 위선과 허위, 기회주의, 적반하장, 참으로 추하고 비열하다. 이런 식으로 거리에 현수막을 걸었다. 이재명과 탄핵은 관계 없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12.3 게엄'을 일으킨 쿠데타, 즉 내란이다. 거리를 오염시키고, 일부 시민들을 왜곡시킨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다음과 같이 질타하는 소리가 들린다. ‘국가는 국민을 버릴 지언정 국민은 국가를 버리지 않는다.’ ‘대구와 부산은 권력욕으로 뒤덮인 보수의 텃밭이 아니다.’ ‘위기의 나라를 온몸을 던져 구하는 자들은 노동자, 약자, 여성들이다.’

3. 
벌써 대의를 무너뜨리고 정의를 짓밟은 자들에게 철퇴를 내렸어야만한다. 왜냐하면 불의와 부조리에 타협한 자들을 심판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가 바로 윤의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역사를 왜곡 하는 이들을 처단 했어야 한다. 해방 후 반민특위를 관철하지 못한 게 이승만의 독재를 야기하게 했고, 그 이승만 독재를 야멸차게 청산하지 못하다 보니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또 만들었다. 이게 이 나라 악의 상징 전두환의 등장으로 옳은 심판을 또 못하다 보니 친일 부역 세력, 적폐들이 내내 기회를 엿보며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저 윤에게까지 옮아왔던 것이다. 전두환을 자연사 하도록 처딘하지 못한 것 역사의 오점이다.

4. 
이 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룹이 흥미롭게도 2030의 MZ 세대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공적 기능이 마비될 때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집단적 참사 다음은 바로 자신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의 정치 철학은 역사에서 언제나 명료했다. 그들은 칸트가 주장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갖췄다. 그들은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금과옥조로 삼는 황금률이다. 디지털 유목민이자 원주민인 그들은 세계 시민의 역량을 갖춰가고 있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중시하고, 개성과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다. 윤석열류의 약육강식의 자유에 대항하는 보편과 중용을 구현할 MZ세대의 자유가 반드시 승리하고 있고 승리할 것이다. 이 사태의 결말을 끝까지 주시하는 그들은 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5. 
'은박 담요'를 덮어쓴 젊은이들의 ‘한남대로 키세스 시위대’는 흡사 고고한 선사(禪師) 모습 같았다. 독선과 아집의 타락한 정치를 끝내려는 수행자들의 모급이었다.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있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 나라는 다으과 같이 대 개혁되어야 한다. 
▪ 승자독식을 제어하고, 
▪ 공공(公共)의 사회철학을 수립하며, 
▪ 공동체에 대한 책임 윤리를 고양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 저항권을 백성의 권리로 명문화하여 사욕에 눈 먼 위정자들이 정치 판에 못 서게 해야 한다.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은, 정치의 목적은 인간의 선함과 덕성에 기반해 사회적 도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곧 이 나라를 이끌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어떻게 가꿔가야 하는 가를 묻는 거대한 정치적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6. 
내란의 수괴와 그 잔 존 세력들을 잘 진압하면, 나는 구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확신한다. 사익과 공익, 파시즘과 공화, 불평등과 공정, 분열과 통합의 투쟁에서 후자가 전자를 밀어내고 승리할 것이다. 이 전선에 앞장선 젊음, 이 나라의 수호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을 '빛 혁명 세대'라고 부른다. 한국 민주주의는 청년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으로 구축되었다. 미안 해하는 노인들 또한 한때의 젊음을 정의의 횃불로 불태워 이 나라의 어둠을 밝히지 않았던 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몰염치하고 부도덕하며 반역사적인 인물들이 사회를 지배하며, 국지전을 일으켜 정적들을 탄압하고, 반란을 혁명으로 둔갑시켜 역사책에서나 보던 왕의 출현을 볼 수도 있었다는 거다. 이제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은 이제 각자 개인들의 욕망을 선택하지 말고 사람을 선택하는 거다.

7. 
민주 시민을 위한 정치 학교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배우며, 생각을 나누고, 뭉쳐 연대의 힘으로 좋은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논의하여야 한다. 정치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정치여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 정자정야)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치 과몰입도 몰 정치도 아닌, 마음 놓고 지지할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 너무 많다. 다음 선거에서는 단호하게 처단해야 한다.

8. 
인문 정신으로 사고의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다. ‘재능(才能)'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터전에서 내가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워 재배해야 할 꽃이다. 내가 그 재능을 무시하거나 방치하면, 그것은 나를 내 삶을 망치는 폭군으로 만들 것이다. 나에게 명예로운 것은 무엇인가? 내 삶에 안녕을 선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 삶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을 망치는 폭군이 될 것인가?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모르는 게 죄이다. 묵상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응시이다. 묵상을 통해 매일 수렴과 집중으로 원심력을 제어하는 구심력의 힘을 키우고 '나만의 화살을 쏘는 법'을 익혀야 한다.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려면 목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겨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예상하고 노력한 것보다 나를 낮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질투와 시기가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이루려는 사람에겐 늘 여분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 즉 인생에는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도, 내비게이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 해도 세상은 수시로 나를 흔든다. 올해 역시 우리들의 삶에 수많은 바람이 불다 멈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바람 속에서도 과녁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바람의 유무보다 중요한 건 예상치 못한 바람 속에서도 끝내 중심을 잡으려는 태도, 그리고 나의 화살을 들고 과녁에 명중시키겠다는 그 마음이다.

9. 
그리스 비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비극적인 주인공에 관한 연극이다. 비극적인 리더의 그 치명적인 결점을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명명하였다. '하마르티아'는 자신이 가야 할 길로부터 이탈하여 헤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마르티아'의 근본적인 의미는 궁술에서 따왔다. 궁수가 활을 당겨 화살을 쏘지만, 그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모두 '하마르티아'라고 부른다. 그런 경우들은 다음과 같다.
▪ 궁수가 과녁을 찾지 못하는 경우
▪ 과녁이 너무 멀어, 화살이 도달할 수 없거나 너무 가까워 활을 당길 수 없는 경우다, 
▪ 과녁을 찾았지만, 활을 뒤로 충분히 당길 근육이 없는 경우다. 활이 더 이상 뒤로 당길 수 없는 부러지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고 가야 화살이 쏜 살처럼 과녁으로 돌진할 수 있다.
▪ 궁수가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고 여러 잡념으로 무아상태로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쏜 화살은 도달하지 못하거나 비껴 나갈 수 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비극적인 주인공의 천성을 ‘하마르티아’라고 규정했다. 자신이 어제까지 가던 길을 옳다고 당연히 추정하고 그 길을 가는 행위다. 그런 마음이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하루를 어제의 습관대로, 어제의 문법으로 이해하려는 '억지' 이다. 그리스도교의 기획자인 바울도 이 단어를 이용하여 ‘죄’를 설명하였다. ‘죄’는 '신이 정한 인간을 위한 최선의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죄’란 규율이나 교리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표의 존재에 대한 무시이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매일 매일 실천하지 않는 게으름이며, 그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다. 이 ‘죄’를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죄'는 나의 행위가 도덕적 선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만일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비겁한 거다. 말 그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다. 영어의 죄(sin)라는 말이 '과녁을 벗어 나다'라는 뜻이다.

10. 
사람들은 자신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용기(勇氣)라고 착각하고 그런 집단행동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발판이라고 호도한다. 대한민국은 무절제 공화국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편협하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언행을 누군가에게 점검 받아야 한다.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언행이, 자신의 최선인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진짜' 민주주의는 한없이 정제된 언행과 집단의 숙고(熟考)를 통해 만들어진 결정을 수용하고 준수하려는 과정이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이 편협한 편견이란 사실을 모르고 말을 쏟아 내는 정치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의 정서를 점점 각박하게 만든다. 그들은 '침묵이란 자신의 언행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 표시이고, 언행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준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은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형벌을 받는 장소다. 그들의 죄명은 무절제(無節制)였다. 용감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의 결과를 알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의 결과 모르면 무식한 것이다. 그 때 무식하면 무모하다. 그러니 '무식하면 용감 하다'는 틀린 말이다. 무식하면 무모(無謀)하다. 무모는 앞 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성이나 꾀가 없는 짓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없는 거다.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아가 없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잘 구축되지 않은 사람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내 마음을 잘 대변하는, 박화남 시인의 것이다. 사진은 어느 페친의 페북에서 허가 없이 갖다가 갈무리한 것이다. 최근 나를 보는 듯하다.


죄와 벌/박화남
 
맞아야 할 돌이라면
내가 대신 맞겠다
얼어 있는 호수가 안고 있는 돌멩이
더 깊이 몸에 박힐수록
아픈 곳이 녹는다
 
누구 나가 깊디 깊은 곳에
저 마다의
돌멩이가 박혀 있습니다.
소리 없이 깊이 박혀
있다가 삶의 어느 순간
생체기를
내고 아픈 통증을 안겨주곤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돌멩이를 사랑과
연민으로 감싸 안아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박힌 돌멩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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