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리망의(見利忘義): 이로움을 보느라 의로움을 잊었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11일)
올해부터는 매월 한 권식 서양 고전 소설을 꼼꼼하게 다시 읽기로 했다. 맨 처음 택한 것이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디킨스가 1861년에 발표한 작품인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은 조 가저리(Joe Gargery)다. 허영에 물든 신사의 세계를 동경해 신사를 흉내 내는 필립 핍(Philip Pip)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조 가저리는 누나의 남편이다. 평생 성실한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우직한 소시민이다. 그런데 런던 신사의 세계에서 한때 잘 나가던 핍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를 찾아온다. 가저리는 그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도와준다. 디킨스는 말한다. 잘 사는 인생이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직분(職分)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를 파블로 피카소는 조금 근사하게 변형시킨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한발 짝 더 내디뎌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감동을 준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모든 창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공헌 등은 우선 자신이 확장되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공적인 역할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하나의 수고가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수고가 있어야 세상은 더 나아지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더 성숙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다음 말에 생각이 멈추었다. "나는 최근 한 배우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우리 ‘무지한 인간’에 대해 돌아봤다. 경찰은 마약수사를 스펙터클로 만들어 성과를 포장하기 위해, 미디어는 주목을 끌어 돈을 벌려고, 대중은 도파민과 함께 판관으로서의 효능감을 누리느라, 사람에게 낙인을 찍어 사냥감으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진실’ 혹은 ‘의로움’은 알 바 아닌 것이 된다. 그야말로 교수신문이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견리망의(見利忘義)’다."
한국의 교수들은 올 작년 한 해를 다음 같이 평가했다. "이로움을 좇느라 의로움을 잊은 한 해"이다. <교수신문>은 지남 10일 전국 대학교수 1315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교수 30.1%(395명)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다고 밝혔다. ‘이로움을 보느라 의로움을 잊었다’는 의미다. 견리망의를 올해의 사자성어 후보로 추천한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중어중문학과)는 “지금 우리 사회는 견리망의 현상이 난무해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다”며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 편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경우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이 거론되고 있다”고 했다. 정치, 정책 등 공적인 영역마저 사익 추구에 잠식당한 상황을 짚은 것이다. 그는 이어 전세 사기, 학부모의 교육 활동 침해 사건 등을 언급하며 견리망의 현상이 “개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로움(이익)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거다. 이익추구로 가치 상실의 시대가 되어가는 것을 꼬집는 거다.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건 한편으론 희망이기도 하다. 당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할 때 나오는 반응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 원인을 모르는 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사람들은 기후 위기가 아니라, 이제는 기후 고통의 시대라고 말한다. "기후고통은 기후위기로 인해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의미한다.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이를 다른 어떤 말이 아닌 ‘고통’이라고 부르는 건 사람들이 우울뿐 아니라 죄책감, 불안, 분노, 좌절, 억울함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런 고통의 총량이 “세계대전에 준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손희정)
문제는 많은 이들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 원인을 모르는 척한다는 점이다. 새로 접하는 정보로 인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 등이 흔들릴 때, 그래서 자신이 지켜온 정체성이 위협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기꺼이 모르기를 선택한다는 거다. 손희정에 따르면, 정보처리 방식에 따라 인간을 나누어 분석한 스웨덴 린셰핑대 팅회그 교수 연구팀은 ‘모르기를 선호하는 인간’을 무지한 인간, 즉 ‘호모 이그노런스’라고 칭한다고 했다. 호모 이그노런스를 우리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무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오늘 아침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본다.
1. 새로 접하는 정보로 인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 등이 흔들릴 때, 그래서 자신이 지켜온 정체성이 위협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기꺼이 모르기를 선택한다
2.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건 한편으론 희망이기도 하다. 당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할 때 나오는 반응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 원인을 모르는 척한다는 점이다.
3. 게다가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處事)를 우리는 '무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을 막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를 통해, 우리는 나와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에서의 공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4. 종교는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게 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체계이다. 변화를 주지 않는 종교는 말장난이고,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종교는 무식하다.
5.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 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신이 누군인지를 알게 하고, 더 나아가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반면, 자기 인식을 통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6.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전에,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탐구를 통해 믿음을 쌓아가다가 이 믿음이 지속되면 그것을 절대 신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게 어떤 사람에 대해 믿음을 주는 작동 원리이다. 관찰과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대부분은 지속성이 없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좀 다르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은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 들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폄하하며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터무니없이 주장한다. 이런 무지(無知), 아니 무식(無識)은 더 무섭다.
7.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8.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 한다. 반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양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이 고유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을 배철현 교수는 '무식(無識)한 사람'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호모 이그노런스이다.
9. 용감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의 결과를 알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의 결과를 모르면 무식한 것이다. 그 때 무식하면 무모하다. 그러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틀린 말이다. '무식하면 무모(無謀)'하다. '무모'는 앞 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성이나 꾀가 없는 짓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없는 거다.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아가 없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잘 구축되지 않은 사람이다.
10.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건강한 국가가 된다. 그래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자신의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며 친절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양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가 무식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행이 수치(羞恥)이다.
우리는 호모 이그노런스가 되면서, 문제는 우리가 계속 외로워진다는 거다. 그건 사회가 더 다음과 같이 외로움을 강화 시킨다.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평생 시달려온 시험 만능주의와 ‘두 번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생존주의를 먹고 자라, 모두가 볼거리가 되는 주목경쟁의 시대에 극대화된다. 발아래는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기댈 수 있는 공동체나 곁이 없다면 어떻게든 내 한 몸만은 지키겠다는 보신주의가 발동한다. 김만권은 <외로움의 습격>에서 이런 자기중심적인 외로움이 타인을 배제하고 차별함으로써 ‘밥그릇’을 지키려는 혐오정치로도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에 '웃기는' 한 사람이 나와 웃긴다. 자신이 얼마나 무식한지 모르고, 잘난 척한다. “5000만이 쓰는 언어를 쓰겠다”며 ‘여의도 사투리’를 멀리 할 거라면서, 최근 웃기는 그 놈은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것처럼 말하는 여의도 사투리를 쓰며 사방 팔방 돌아다닌다. 진짜 여의도 정치인이 되려면 ‘여의도 문법’에 익숙해야 한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와도 밤새도록 대화해 주고받기를 하고, 위기가 닥치면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측근도 읍참마속하는 게 여의도 문법 말이다. 대신 그는 여전히 ‘서초동 사투리’ 혹은 ‘서초동 문법’으로 대화하는 걸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그는 어떤 연설 말미에 “여러분, 동료 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 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라고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발표한 <환상 속의 그대>에 나오는 ‘무엇을 망설이나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라는 부분을 참고한 것 같다. 그의 생각이 사특한데, 자신이 X세대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민주당 주축인 86세대와 대비되는 인상을 주고 싶어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웃긴다. 말로 되는 게, 아니다, 평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중앙일보 허진 정치부 기자의 다음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을 되 돌아 보아야 한다. "여의도 사투리에 적응한 한 위원장은 최근 기자의 질문을 자주 피하고 있다. 기자들을 대거 대동하고 일정을 다니면서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건 여의도 문법으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여의도 사투리를 쓰면서 서초동 문법을 고집하는 건 몸은 여의도에, 마음은 서초동에 있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왕 ‘동료 시민’과 함께하려면 온전한 여의도 문법부터 익히는 게 순리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와도 밤새도록 대화해 주고받기를 하고, 위기가 닥치면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측근도 읍참마속하는 게 여의도 문법 말이다.
오늘 아침에 <인문 일지>를 쓰면서 떠오른 시이다.
눈사람 자살사건/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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