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1. 7. 6. 09:4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물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실제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사물을 보았다고 해도 사람들마다 내리는 해석은 그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생각이 형성된 환경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깊이와 폭이 넓고 깊다. 그러니까 세상에 불변하는 유일한 실재(實在)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 개개인의 관점만큼이나 다양한 해석들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극히 적은 일부의 지식을 사물의 총체, 즉 진리인 양 말한다.

예컨대, 숲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직관적으로 우리는 숲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이 숲의 본질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나무, 오솔길, 샘, 새들의 노랫소리, 풀잎들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것의 본질은 아니다. 그럼 본질이란 무엇인가? 가능한 모든 관점의 총합이다.

빛을 한쪽으로만 비추고 사물을 파악하는 단일적 성격의 인식론이 아니라, 사방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의 한 가운데에 사물을 놓고 보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각 관점들은 서로 배척함이 없이 통합되며, 통합된 총체적인 지식을 얻는 그 힘을 우리는 통찰력이라고 한다.

다만 누구나 이러한 통찰력을 가질 수 없으므로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삶의 도구로서 개발된 개념이 얼마 만큼이나 사물의 본체에 상응할 수 있을까? 사물들을 구별하는 데 혼돈이 없게 하며 사물 간에 경계선을 그어주는 역할로는 충분하지만 그것이 사물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만든 기존 관념과 개념에서 이탈하면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는 그것을 미친 짓으로 간주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관념과 인식의 세계를 달리하는 두 사람에게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 힘을 길러주는 것이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이다.

종자(從子, 남에 종속되어 따라 다니는 사람) 산초 판사와 함께한 두 번째 모험에서 그 유명한 "풍차-거인" 사건 이야기는 가장 인상적이다. 들판에 서 있는 풍차들을 발견한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 산초 판사여, 저기를 좀 보게! 서른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인들이 있네. 나는 싸워 저놈들을 몰살시킬 것이야." 그러자 이에 대한 산초의 답이다. "나리,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닙니다. 풍차 입니다. 팔로 보신 건 날개인데, 바람의 힘으로 돌아서 방아를 움직이죠." 하지만 돈키호테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보아하니 자네는 모험을 도통 모르는 모양이군. 저건 거인이야." 이와 같이 주인과 종자의 관점 차이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이 소설에서 꾸준히 이어진다. 그래 재미있어, 책을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한다.

돈키호테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머리를 거치며 그의 관념인 기사 소설상의 세계에 투영된다. 그러나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나 산초 판사에게 누가 더 정당한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현실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러한 다양성을 반영하지 않는 정의는 무엇이든 현실을 왜곡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단 한가지 생각만을 강요했던, 그래서 모두가 그 한 가지 사실에 미쳐 있었던 상황을 부정하고 그러한 체계에 첨예하게 도전하여 '다름'이 인정받는 세상을 열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본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면 어떤가? '풀잎'하고 자꾸 부르며,  "푸른 풀잎이 돼 버리는" 거다. 날씨가 때 아닌 폭염이다. 그래도 마음은 푸르렀음 한다.

풀잎/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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