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없다.
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1월 27일)
어제에 이어, 읽은 소설에서 만난 어휘들을 몇 가지 더 공유하고, 그 단편소설 이야기를 한다. <인문 일지>는 어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 "까닭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이 문장을 쓰고 났더니, 언젠가 이해인 수녀님의 인터뷰를 보고 적어 두었던 생각들이 소환되었다. 다시 공유하며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이해인 수녀님과 다시 나를 되돌아본다. 삶의 지혜를 준다.
(1) "우리 안에 순한 마음이 있다."
▪ "인간은 다면적이다." 한 면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 구상 시인의 우정론을 따른다고 했다. “사람들이 우정을 틀 때 장점부터 트지만, 나는 단점부터 튼다. 좋은 점만 보면 누구인들 친구를 못하겠냐. 손가락질 받는 이라 해도 친구가 있어야 살지 않겠냐. 내가 그 역할을 하겠다."
▪ "상처 많은 이들과 함께하려 한다. 물론 지성적으로 멋있는 사람들과 만나면 좋지만."
(2) "부름을 받았다며 열성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나도 부담스럽다.
▪ "영성 생활에서 드라마틱한 것을 꿈꾸는 거 위험하다. 꾸준히 평범해야 하는데 드라마틱한 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아닐 때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진다." 드라마틱이라는 말은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이 아닌 예능이 위험하다. 예능과 예술을 잘 구별해야 한다.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능은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은 추상적이지만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만화만, TV 드라마에만 관심을 두면, 예술을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 예능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의 핵심은 미학적 정서와 철학적 사유이다. 즉 정서적 미학과 철학적 가치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동과 변화이다. 가짜와 진짜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때는 불에 타 죽을 것처럼, 그러다가 조금만 감미로운 기운이 떨어지면 못 견딘다. 차라리 그 기운을 좀 아껴서 꾸준하게 한결같이 가는 걸음이 중요하다." 꾸준함은 처음의 마음을 꾸준히 지니는 마음이다. 처음과 같은 꾸준함, 재능을 이기는 것은 꾸준함이라고 본다.
▪ "판단 보류의 영성"이란 말이 좋다. ”인간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사랑은 빨리하라"는 거다. "판단보류라는 말은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이다. 보류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꾸 실수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 비슷비슷하다. "참 너도 노력하는데 뜻대로 잘 안되지"라며 연민의 정을 갖는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낫냐"며 당당해 한다.
▪ "십자가에 박혀 나타나는 그런 하느님 말고, 내 존재 안에 달빛처럼 스며들어서[달빛처럼 스며드는 빛의 느낌], 내 마음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친척처럼 열린 것을 나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싶다." 예를 들어, "암에 걸려서 고통스럽지만 원망하지 않고 이 아픔을 통해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씩씩하게 견디는 이 힘이 은총이다."
▪ 수도의 길은 일상에서의 수도가 중요하다. 깨우침도 대나무처럼 매듭이 있다. 안 풀리면 그렇게 있다가 또다시 맺는, 그런 게 수도이다.
▪ ”상투스, 상투스“('거룩하시다'로 시작하는 성가): 입만 열면 거룩한 소리로 남 한테 부담을 줄 때 하는 말이다. 맛있게 먹고, 남을 비난하거나 그러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더 겸손하다. 남을 비난하지 말자, 타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수녀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은 하나였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였다.
(3) "SNS에서 잘난 척하지 말자." 사람의 심사가 살랑살랑하다. SNS에서 대놓고 비난하지 말자. 그런다고 그 사람이 바뀔 일은 전혀 없다.
▪ 지식습득은 그만하고 인간을 해석해서 배려하는 태도를 갖는다.
▪ 잘난 척 하지 말자. 다 사람마다 특수한 상황이 있다. 나 또한 실수 투성이이고 잘 난 것 없으니, 리더가 되려 하지 말고,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일을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다.
▪ 어떤 이가 말을 하면, 그가 말하고 싶은 마음을 알아주고 눈을 맞추면서 들어준다. 그런 식으로 마음과 마음을 교감하는 거다.
▪ 다른 이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니까 내가 있는 거다.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의 멋진 모습이다.
▪ 약점을 자랑한다. ”내가 자랑할 것은 약점밖에 없다.“ 약점을 자랑하는 용기가 있으면 산다. 언젠가 망신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산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밑에 있는 사람이 더 역동적으로 삶을 살고, 당당하다. 비루하지 않다.
▪ 어리석음과 약점을 항상 드러내 놓고 사시던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만 하고 같이 살아보지 못해서 거기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김 추기경의 말은 늘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젠체하거나 경건을 따지지 않고 자연스럽다.
- "일일이 아랑곳하다간…..." 여기서 '아랑곳'은 '남의 일에 나서서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는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을 누가 맡든지 내 아랑곳 있나요”에서와 같이 긍정문에 쓰이기도 하지만 “그는 그녀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에서처럼 주로 부정문과 결합해 사용된다. ‘어떤 일에 참견을 하거나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아랑곳없다’, 이를 활용한 ‘아랑곳없이’가 한 단어로 쓰이다 보니 ‘아랑곳 않다’ 또한 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아랑곳 않다’는 ‘아랑곳하지 않다’를 줄여 쓴 것이며, ‘아랑곳하지 않다’ 또는 ‘아랑곳을 하지 않다’가 바른말이다.
'아랑곳하지 않다'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이 어떤 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우에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일에 나서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아랑곳하다'는 '일에 나서서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다'로 쓰인다. 그러므로 부정형의 의미는 '어떤 일에 관심을 갖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다.
한자로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즉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모른 채 한다는 말이다. 프랑스어는 '즈 멍 푸(Je m'en fous)'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네 알 봐 아니다', '그건 네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의미이다.
비슷한 말로 수수방관(袖手傍觀)이다. 그 뉘앙스는 다르다고 본다. 말 그대로 하면,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말로,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프랑스어의 'Je m'en fous'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주체적 결심에서 나온 말로 나는 이해했다. 살다 보면, 주변에 '오지랖 넓은'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들이 있다. 괜히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 말이다.
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기회가 없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는 사회는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 존재가 귀속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비춰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낯설게 보여주는, 그런 '불편한 거울'이 있으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언론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나름 위로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좀 심하다.
한 문장을 놓고, 여러 각도로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다. 요즈음 우리들은 책과 글자 대신 이미지와 동영상이 우선이다. 심각한 것은 나이가 어릴수록 글보다 시청각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무언가를 찾아볼 때, 네이버로 단어를 검색하기보다 유투브로 동영상을 찾는 데 익숙하다. 뭐 나도 유튜브를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문자와 SNS에 길들여져 단문 중심으로 소통하고, 글이나 책은 읽기 어려워 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학생들조차도 신문기사 정도의 글을 읽는 것도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다가, 미래의 인간은 깊이 있는 생각에서 점점 멀어지고, 추론과 논리 능력도 퇴보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점점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를 씻지 못할 것이다. 시대가 변해 우리가 쓰는 소통의 도구가 이미지와 동영상이 주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문자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걱정이다.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는 곧 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한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언어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생각도 멈춰버릴까 걱정이다.
파커 만년필에는/울라브 하우게(Olav H. Hauge·1908~1994)
파커 만년필에는 시가 많이 들어 있다, 1킬로미터나 죽,
잉크병엔 더 많이 있다,
몇 마일이 있다. 종이는 우편물로, 고지서로, 광고로,
채우라는 서식으로 들어온다.
나는 자신 있게 미래와 마주한다.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는 울빅은 노르웨인 시인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파커 만년필"에 들어 있는 시들, 아직 쓰이지 못한 시들, "잉크병에는 더 많"은 시들, 세상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인 잉크병들에 담긴 셀 수 없는 시들, 우리 곁에서 받아 쓰라고 하는데 우리의 눈과 귀가 흐려져, 심장이 굳어져 쓸 수가 없다. 시로 태어나지 못한 종이들은 딱딱한 "고지서"로 오기도 한다. 그래도 시인은 "미래"를 말한다. 자연 속에 있다고 세상을 버린 건 아니다. 자연과 합체했을 때 더 명료해지는 진실들. 세상의 더러움에 대고 그는 자신의 시 <그들이 법을 만든다>에서 이렇게 쓴다.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 이 시를 소개한 이설야 시인인 멋진 덧붙임을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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