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소서!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벌써 11월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다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데미안>) 세월 참 빠르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두고,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한다. 장자는 우리의 삶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다. 홀연할 따름이다!"(『장자』 외편 "지북유")고 했다. 이를 간단히 우리는 "백구과극"이라 한다. 우리의 삶이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틈새를 지나치는 순간"이라는 백구과극이 실감나는 아침이다.
코로나-19가 재 창궐하며, 세상은 '거리 두기'를 강제한다. 그럴수록 '나'를 지키는 것이 모두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개인 방역 수칙에 더 철저하기를 마음 먹는다. 방심(放心)은 쉽다.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투스가 한 말이 지금도 혜안을 준다. 그가 한 말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며 변한다.
그러나 서양 철학과 종교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사유하는데 편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한문 명(明)자를 가지고 늘 깨어 있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明)'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물론 그 경계에 서면, 힘들고 어렵다. 방황하고 흔들린다. 이어지는 사유는 시를 공유한 다음, 나의 블로그에서 계속할 생각이다. 정치권이 시끄럽다. 두 대립면(추-윤)을 다 품는 '지혜(明)'이 나왔으면 한다. 각자의 길(道)을 찾았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의 화두로 '구도(求道)'를 택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소서('Protect us from what we want).' 정말 '우리 자신을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말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어렵다.
그래 정약용은 자신의 방 이름을 "수오실(守吾室)"이라 지었는가 보다. '나를 지키는 방'이란 말이다. 이 이름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항상 나 자신에게 '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정약용은 형님의 서재에 붙인 이름에 대해, '유배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깊은 뜻을 깨달었다 한다. '나'라는 것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잠시라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출세에 혹하고, 돈에도 혹하며, 미인에게도 혹해 버리기 일쑤이다. '나'라는 존재는 한번 유혹에 휩쓸리면 다시 돌아오기도 어려우니, 붙잡을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었다는 것이다. '나(吾)를 잘 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라고 정약용은 고백했다. 그는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과거를 부끄러워했다.
오늘 아침 시인은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에게서 "구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사진은 늘 내가 산책다니 탄동천 길의 미루나무들이다. "나무는 나무이다가 계절이다가 고독이다가 우주이다가/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나무이기에 나무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나다. 나는 나일 뿐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나다. I am nothing, but I am who I am.
구도자/고재종
나무는 결가부좌를 튼 채 먼 곳을 보지 않는다
나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제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메마르고 긴 몸, 고즈넉이 무심한 침묵
나무는 햇살 속을 흐른다 바람은 나무를 관통한다
나무는 나무이다가 계절이다가 고독이다가 우주이다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나무이기에 나무이다
제 머리숲을 화들짝 열어 허공에 새를 쏘아댄들
나무는 거기 그만한 물색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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