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신과 정직한 대면을 통해, 나를 만나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29. 18:07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이 제안하는 "책 읽고 건너가기 제4탄(2020년 10월의 책) 『데미안』에 대한 최진석 교수와 개그맨 고명환이 함께 하는 북 토크를 YouTube로 두 번이나 들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각자 깨어 있는 ‘위대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개인이 위대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프랑스인들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유, 평동, 박애의 정신을 정하고 사회를 디자인하였다.

자유라는 정신에서 그들은 “봉구(Bon Gout, 좋은 취향)”를 찾아내,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유라는 말로 내 인생을 네가 주인공으로 사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철학적 기반을 만들어 주어 각자의 삶을 자기 것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프랑스 인들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가장 ‘자기 자신 답게’ 살아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등,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그들이 만들어 낸 공화국 정신은 ‘고르게 가난하게 살자’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몽테스키외는 공화주의에서 시민은 “소박하게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평등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라는 점도 나는 꼭 기억하고 싶다. 프랑스는 모두가 평등하니, 모두 다 다름을 받아 들이는 똘레랑스(tolerance-관용 보다는 차이 인정) 문화를 정착시켰다.

박애는 ‘사랑’, ‘친절’의 개념이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으니, 서로 입장을 바꿔 다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강조했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이다.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사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는 연대정신(solidarite)이 살아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위대한 개인'이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위대한 개인'이 다시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고 본다. 마치 웅장한 건물을 지탱하는 한 장의 벽돌처럼. 그 위대한 개인이 되려면, 늘 공부를 하며 배워야 한다. 배움을 통해 매일매일 위대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일상 속에서 탈출해 자신에게 유일하고 진실한 자아와 자신만의 임무를 발견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말한다. 이곳에서 저 곳으로 건너가기 이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그 성찰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을 성숙해 가는 것이다.

자신과 정직한 대면을 통해, 나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살아가기 쉽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그 어떤 허상을 위해 맹목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관조하는 묵상을 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배철현 교수의 제안처럼, 매일매일 인생의 초보자로 다시 태어나 ‘처음처럼’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는『심연』이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당부한다.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십시오!”라고. 심연이라는 말은 원래 끝을 알 수 없는 연못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위대한 나를 만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심오한 “마음의 연못”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장소, 이 심연을 통해 우리는 이익(好利避害, 호리피해, 자기 이익은 좋아하고, 손해는 싫어하는 마음)에 매몰된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고 한다. 나도 과거의 나와 결별하기 위해 매일 아침 처음으로 인생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심연에서 나를 만나고 싶다.

그에 따르면, 심연의 단계에 들어서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에 몰입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심연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 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참나’ 속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사랑도 그렇고,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에 대한 몰입 없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교육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를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우리의 교육문법을 바꾸지 않으면, ‘위대한 개인’이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배철현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소크라테스의 철학 자체가 아닌, 소크라테스의 삶을 이해하고 지향해야 하는 것처럼, 특정 직업군을 정해 놓고, 그대로 아이들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What do you want?”라는 질문을 던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창의성이 발현된다.” 두 손 들어 나는 동의한다. 또 그는 “자신이 정한 길을 당당히 갈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의대나 법대에 가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고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서안나 시인을 모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모과 나무에 잎은 다 떨어지고, 모과만 몇 개 매달린 갓을 줌으로 잡고 찍은 사진이 있어, 그녀의 시와 모과 사진을 오늘 공유한다. 어제 모신 '주'님으로 힘들다.

모과 / 서안나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나로 살아야 존재의 완성을 경험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다." 북 토크를 듣고 이런 문장들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어제 유튜브를 듣고, 언젠가 최교수의 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 개정판의 서문을 읽고 적어 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데미안』을 이해했다.

#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주인과 달리 노예는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살다 보면, 내면의 불균형에 직면한다. 문제는 그 불균형 때문에, 선명성과 불타협의 철저함을 발휘하여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기만을 한다는 것이다.

# 노예는 기준을 만들고, 기준을 지키는 일을 당연시하고 중요하게 다룬다. 게다가 무엇이나 기준을 만들어 윤리적 접근을 하려 한다. 그래 윤리적 행위에 익숙해지면 또 다시 열심히 규제를 만든다. 그리고는 새로운 세계를 구시대의 규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 바보짓을 하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윤리적 부담은 전혀 없다.

#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곡선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림쇠, 직선을 긋는 먹줄, 네모꼴을 만드는 곱자를 들이대면 본래적인 활동성이 손상된다. 밧줄이나 갖풀이나 옻칠로 세상을 꼭 묶거나 고정시키면 세상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다. 여기서 그림쇠, 먹줄 곱자, 밧줄, 갖풀, 옻칠은 모두 윤리적 신념이나 규제들이다.

#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신념을 세상에 선제적으로 부가하는 한, 세상의 효율성은 극도로 약화된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먼저 가져다 대면 세상 전개가 위축된다. 게다가 윤리적 관념이라는 것이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쓰인다. 칼을 의사가 잡으면 생명을 살리고, 폭력배가 잡으면 생명을 상하게 한다. 여기서의 정의가 거기서는 불의 하다. 선과 악도 분리되지 않고 교차된다. 윤리 도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규제가 많고 조밀할수록 선한 기풍과 효율이 커질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세상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좁고 비효율적으로 헤매게 되는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것이다.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꾸며서 사랑받기 보단 욕먹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게 훨씬 낫다. 싫은 건 나쁜 게 아니다. 나쁜 짓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데 남이 싫어한다고 참을 일은 아니다. 싫은 건 개인의 취향이다. 오늘 시처럼,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삶이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그 엇 박자에 미치고 만다. 바람직한 일에 매달리기보다 바라고 원하는 일에, 좋은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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