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마음놓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코로나-19 속의 느리던 삶이 생활 속 거리두기 1단계로 내려오면서, 또 지난 기억들을 잊고 빠르게 춤추는 일상이다. 그래 오늘은 아무 일정 없이 오로지 '나'하고만 놀 계획이다. 어제 2020년 1월 2월에 쓴 글들을 인쇄하였다. 빛이 가득 드는 카페를 찾아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10개월 전 이야기인데, 어제 있었던 일들 같다. 세월이 그만큼 빨리 흘렀다는 말이다. 살아온 10개월이 앞으로 남은 날들에게 묻는다. 류시화 사인이 했던 질문을 나도 해본다. "마음챙김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마음놓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래 오늘 아침도 류시화 시인이 엮은 <마음챙김의 시>에서 한 편을 골라 공유한다. 이 시는 시인이 신장병 치료를 받던 중 신장 이식 수술에 실패하고,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느껴서 쓴 시라고 한다.
더 느리게 춤추라/데이비드 L. 웨더포드
회전목마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 가는 태양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하루하루를 바쁘게 뛰어다니는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서도
대답조차 듣지 못할 만큼
하루가 끝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앞으로 할 백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달려가는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아이에게 말한 적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서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달려갈 때
그곳으로 가는 즐거움의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다.
삶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라.
노래가 끝나기 전에.
매일 아침마다 페이스북의 내 담벼락에는 <과거의 오늘>이라는 그룹에서 예전에 올린 글들이 다시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다시 <인문운동가 박한표>로 묶은 그룹에 쌓아놓는다. 2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가, 오늘 아침 내 기분을 달래 준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의 소원>이다. 이 시를 다시 읽고 가을이 가기 전에 이렇게 소원하기로 다짐했다. 시인이 바라는 가을의 소원은 다음과 같이 9개이다.
-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 햇볕이 슬어 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 혼자 우는 것
-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봉
-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시인 이해인 수녀님은 <새해의 기도>라는 시에서 10월에는 이런 기도를 하시고 싶다 하셨다.
"10월 (하늘연달 : October) 에는
내 마음이 은혜를 알게 하소서
나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이들의 은혜가
하나하나 생각나게 하소서"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책 읽고 건너가기" 이 달의 책 <데미안>을 다시 읽고 있다. 역시 좋은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최진석 교수는 책을 "놀 듯이 재미 삼아 한가롭게 읽으면" 안 되고, "온 마음을 집중하여 수고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조금이라도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서는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수련"이라 주장한다. 나는 요즈음 그 수련하는 마음으로 <데미안>을 읽고 있다. 어제는 제5장을 읽었다. 그 곳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민음사, p 124)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하나의 틀을 뜨리고 비로소 '참 나'에게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나는 해석한다. 그리고 내 경계를 초월하려는 마음으로 경계 위에서 설 때 만나는 신이 압락사스라고 나는 보았다. 그래 압라사스라는 단어를 구글에 물었더니, '아브락사스'라고 한다. 화자 싱클레어는 이 압락사스를 찾아가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가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인성(人性)과 수성(獸性), 선과 악을 다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해준다. "압락사스는 (…)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민음사 p.125) 이 말을 듣고 화자는 데미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존경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함부로 갈라놓은 세계의 절반만 나타낸다고(그것은 공식적이고, 허용된 <환한> 세계였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화자가 그려내는 꿈의 영상, 문장(紋章)에 그려진 그림, 구름의 모습 등이 압락사스의 모습을 가진다. 화자가 하는 생각을 공유해 본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인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Ibid, p. 128) 책의 맨 처음에 적어 둔 문장,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화자는 압락사스라는 신을 찾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에 집착하다가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절실한 귀기울임과 배화(拜火)를 경험한다. 화자는 또 하나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철학한다는 건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하기>라고 하오." "배화는 인간이 창안해 맨 것 중 가장 멍청한 짓만은 아니었어."
배화(拜火)라는 단어에서 '배(拜)는 절할 배자이고, 화(火)는 불 화자이다. 그러니까 불에게 절을 하는 종교이다, 불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신앙이다. 조로아스터교가 그렇다. 그러니까 '배화교'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는 '낙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목민의 후손임을 짐작하게 하는 이름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의 권위의 신으로 세웠다. 아후라 마즈다는 그 시기 언어로 '지혜(마즈다)의 주인(아후라)'을 뜻한다. 이제까지 다신교 전통에서 신들의 세계에는 선신과 악신이 뒤섞여 있었고, 희생 제물을 드리기만 하면 무조건 복을 주는 신들을 따르는 숭배자들이 많았다. 인드라가 대표적이다. 이 신은 숭배자가 죄를 지었는지 올바르게 살았는지에는 신경 쓰지 않고 권력과 부를 베풀었다. 인간의 욕망에 봉사하는 비윤리적인 신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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