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가 교사다(JE SUIA PROF).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22. 13:34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난 16일 오후 5시쯤(현지 시간) 파리 근교에서 중학교 사회 교사가 퇴근 길에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의해 목이 잘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희생된 교사는 역사 지리를 가르치는 47세의 사뮈엘 빠티(Samuel Paty)였다. 그래 오늘 아침 사진을 보면, "Je suis SAMUEL!"이라는 팻말이 있다. 이는 한국 말로 하면 "내가 사뮈엘이다!"란 말이다. 빠리의 한 시민이 주모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각종 SNS에는  #JeSuisSamuel 또는 #JeSuisProf 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파티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후 프랑스 주요 도시에서 "내가 교사다(JE SUIA PROF)"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나와 동시다발적으로 추모집회가 열리고 있다. 고인을 추모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연대해서 맞설 것을 다짐했다. '나는  ~이다'식의 추모 문구는 이번 사건의 단초가 됐던 2015년 샤를리 에브도 총기난사 테러 추모 때도 등장 했었다.

숨진 교사는 표현의 자유를 가르친다는 취지로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주간지 만평을 보여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한 범인이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명 사회의 한복판에서 목을 자르는 이슬람식 보복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범인은 압둘라 안초로프라는 이름의 18세 소년으로, 러시아 내 자치 지역인 체첸공화국 출신으로 밝혀졌다. 그는 수니파 이슬람교도라고 한다.

이번 사건은 프랑스 주류 사회와 60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내 무슬림과의 갈등이 폭발한 성격을 띠고 있다. 숨진 사뮈엘은 지난 10월 5일에 표현의 자유를 가르친다며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2015년에 게재해 논란을 일으킨 무함마드 풍자 만평을 보여줬다. 무함마드가 알몸으로 엉덩이를 드러내는 모습을 그린 만평이다. 무함마드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기는 무슬림 입장에선 모욕적인 묘사다. 이후 샤를리 에브도 편집국에는 분노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해 편집국장을 비롯해 모두 12명을 사살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프랑스 중등교사 노조 위장인 장레미 지라르는 "많은 교사들이 슬픔에 빠져 있지만, 위축 되지 않겠다"며 "다루가 힘든 주제라고 해서 피하지 않고 학생들의 비판 정신을 독려하고 누구에게나 반대할 권리가 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 복잡한 문제이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점령으로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동과 아프리카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1차 세계대전 뒤에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손에 넣었고, 2차 세계대전 뒤엔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프랑스인 정착촌이 건설됐다. 전후에는 ‘영광의 30년’으로 불리는 경제 호황기를 맞아 과거 식민지에서 이주노동자 수십만명이 프랑스로 건너왔다.

20세기 후반 들어 급속한 산업화는 끝났지만 무슬림 이주자 대부분은 프랑스에 남았고, 이주자 2~3세가 늘면서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했다. 현재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는 전체 인구의 8,8%인 57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프랑스 시민’과 ‘무슬림’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계 주민, 특히 젊은이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차별받고 있다는 정서가 크면 클수록 무슬림이란 정체성에 더 기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럽연합 국가들에선 회원국 시민이 ‘이동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사정은 이슬람극단주의 세력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프랑스에서 손쉽게 지하디스트를 충원하고 테러를 저지를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오늘 21일(현재시간) 파티 교사의 죽음 애도하는 국가적 추모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걱정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더 커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범인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이다. 그냥 평범한 이슬람이 아니다. 배철현 교수는 "종교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종교가 자신에게만 최선일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최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타인에게 강요하는 '독선'이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독선(獨善)'이다. 독선은 자기 혼자만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이나 남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 한 몸의 처신만을 온전하게 하는 행위이다. 배교수에 의하면, 이 독선이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간인 배려와 친절을 자해하는 해악이 된다. 그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독선은 '무식'의 상징이다. 무식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조그만 지식이 최고라고 보는 착각이자 성급한 열등의식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영성'을 키우는 시 한 편을 읽는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마음챙김의 시>에서 가져왔다. 사는 게 별 거 아닌데… 왜 우리는 서로 반목하며 사는가?

잎사귀 하나/까비르(인도 시인)

잎사귀 하나, 바람에 날려
가지에서 떨어지며
나무에게 말하네.
'숲의 왕이여, 이제 가을이 와
나는 떨어져
당신에게서 떨어지네.'

나무가 대답하네
'사랑하는 잎사귀여,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네.
왔다가 가는 것.'

숨을 쉴 때마다
그대를 창조한 이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대 또힌 언제 바람에 떨어질지 알 수 없으나
모든 호흡마다 그 순간을 살라.

프랑스는 식민통치 시대가 끝난 뒤에도 ‘국익’을 앞세우며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서 선뜻 발을 빼지 않았다. 알제리는 1954년부터 8년간이나 독립전쟁을 벌여 70만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1962년에 독립할 수 있었다. 앞서 나치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에는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자치를 요구하던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만명을 죽인 ‘세티프 학살’이 벌어졌다. 또 1961년엔 파리에서 비무장 시위를 벌이던 알제리계 시민들을 경찰이 유혈진압해 최소 200명을 학살하고 일부 주검들을 센강에 던져버렸다. 프랑스 정부는 40년이 지난 2001년에야 이 학살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했다. 알제리, 나아가 과거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이 자신들은 결코 ‘위대한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한 뒤였다.

프랑스는 지금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 참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모리타니·말리·니제르·부르키나파소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 1만여명의 병력과 전투기 수십대, 전차 200여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전통적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가 완전한 세속주의(라이시즘) 국가로 탈바꿈한 것도 극단적 이슬람주의와 부딪친다. 지난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19세기까지만도 교회의 사립학교가 사실상 독점했던 교육이 20세기 들어 자유주의와 세속주의 중심의 공교육 체계로 재편됐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교육 현장이 종교와 세속주의 대결의 축소판이 됐고, 오늘날에는 종교가 풍자의 대상이 됐다”고 썼다. 실제로 이슬람국가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낸 성명에서 “프랑스는 매음과 악의 소굴”이라며 “프랑스뿐 아니라 그와 같은 길을 걷는 모든 나라는 우리의 최우선 공격 목표”라고 경고했다. 이번에 범행을 저지른 압둘라도 범행 직후 트위터에 교사 사뮈엘의 자른 목을 사진과 함께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을 저주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반역자들의 두목인 마크롱, 너의 강아지 중 하나를 처단했다"고 썼다.

프랑스에서 무슬림 인구가 급증하고 테러 위협이 커지면서,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악순환을 낳고 있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창립자인 아버지 장마리 르펜보다는 온건한 편임에도 지난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프랑스의 다문화주의를 겨냥해 “위선은 끝났다”며 노골적인 반이슬람 노선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혈통과 종교를 둘러싼 갈등은 골이 깊다.

글의 방향을 좀 바꾸어 종교 이야기를 좀 하자. 난 온건한 이슬람교들을 좋아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문제는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근본주의자들이 문제이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극단주의의 뿌리를 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다 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과 같은 소프트 타깃 테러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을 갖는 것은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도울 뿐이다. 테러에 대한 대응 능력을 키우되 다양한 사회 불만 요소를 개선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나아가 극단주의의 근원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지구촌 전체가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는 반인륜적이고 비겁한 행위다. 이런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21세기 인류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근본적 해법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나는 이런 문제가 나오면, 배철현 교수의 이 글을 다시 읽는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언제나 한 사람의 숭고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리스도교와 그 교리가 예수 한 사람보다 위대할 수 없다.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언행이 구축한 숭고한 모스크이며, 유교는 공자 생각에 대한 각주일 뿐이다.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의견이고. 불교와 그 교리는 붓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불완전한 몸부림이다. 예수, 무함마드, 공자, 플라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괴테, 단테,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와 같은 인물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심연에서 경청한 소리를 용감하게 외친 사람이다.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에 관한 이론을 공부할 리가 없고, 붓다가 불교에 대한 교리를 만들 리 없다. 성인들은 모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인류를 짐승상태에서 인간상태, 더 나아가 신적인 인간의 상태로 인도한 사람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성인은 누구와 몰려다니며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행위를 의논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엄격히 구분(區分)한다. 그는 자신 스스로 만든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을 사회의 법보다, 종교의 규율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우리는 이런 기준을 ‘양심(良心)’이라고 부른다. 짐승들은 자신들이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한 원칙을 ‘양심’으로 여기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들은 인간은 ‘도시 안에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하면서, 도시라는 문명이 지탱하기 위해서는, 도시가 정한 법이 양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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