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기능이 아니라 가치이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긴 코로나-19로 인한 생활 속 거리 두기 2단계로 모든 강의가 취소되었다가, 이 번 주 월요일부터 아침 강의 가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도 <예~~~술 팀> 와인 특강이 재개 되어 이제야 아침 글을 쓴다. 나는 오전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는가?' 우리 사회는 지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와 인간의 가치를 인격이 아닌 기능에서 찾으려 하는 비인간화라는 시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의 약은 '인문정신', 즉 인문적 가치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 역할이 인문운동가이다.
인문 정신이란 다음과 같이 4 가지를 고민한다.
(1)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2) 균형 잡힌 역사의식,
(3) 온고지신의 지혜로움,
(4) 관용과 책임 있는 공동체 의식이다.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기능이 아니라 가치이다. 인문이라는 말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뜻인데, 인간다움, 인간이 인간 답게 그리는 무늬를 뜻한다. 라틴어로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자각, 아니 사람됨의 깨달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작동 기제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이다. 올림픽에서 외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찾거나, 더 높은 성공의 열차에 타려고 발버둥친다. 과학 기술도 기하급수적인 속도 빨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더 먼 데까지 새 물건을 갖고 달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올림픽 정신과 그 반대에 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인문정신은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고,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일이고,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친화력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랫동안 아침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써서 SNS에 공유하면서 인문운동을 하고 있는데, 글이 길다고, 또 어떤 때는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주변의 몇몇은 읽지 않는다. 그 이유를 지난 달 어느 오후에 낯선 곳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최진석 교수가 자신의 담벼락에 이렇게 적은 것을 읽고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두 문단 정도 읽었는데, 불쾌감이 들기 시작하면 읽기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역사와 정치색이 배인 글을 읽고 기존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는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뜨끔했다. 난 그러지 안 했는가? 나도, 최진석 교수처럼,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는 인문운동가이다. 최교수처럼, 나도 "이 시대에 제가 훈련 받은 '생각하는 능력'으로 갖게 된 어떤 '시각'을 내 삶의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내 글도, 최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두어 문단 읽었는데, 너무 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읽기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지루함을 견디시면서까지 읽어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글은 아닙니다." 최 교수는 말한다. "지루한 글을 읽는 것보다 더 보람 있고 짜릿한 일들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맞아요. 나도 고백한다. "다 짧게 쓰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래 오늘은 언젠가 노트에 적어 두었던 <옛 성현의 교훈>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나를 다스린다. 그리고 나는 배운다.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 성장이다.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실제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부 구경만 하고 있다.
배움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힘'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힘'은 그것을 다룰 수 있도록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강의를 듣거나 누군가로부터 배우면, 그 배운 것을 글로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익힘'을 반복하면 '나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두고 '자유'라고 불렀다. 그러니 배움의 목적은 결국 '자유'를 위해서이다. 사실 자유는 그냥 주워지지 않는다. 내가 자유자재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배워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그 때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로운 나'는 누구인가를 쉼 없이 또 성찰해야 한다. 왜? 뭐 좀 할 줄 안다면, 우리 인간은 오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라''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진짜 무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고 무리하지 않으며, 나를 배려하고 나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다. 즉 멈출 줄 알고, 현실을 잘 직시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혜롭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이 세 가지, 즉 지혜, 아니 나란 누구인가를 깨닫고, 이어서 절제, 용기를 갖는 것이 삶을 '잘 살 줄 아는 방법인 것 같다. 오늘 사진은 지난 토요일에 늘 다니던 산책길에 만난 오리이다. 모르고 그냥 찍었는 이런 색이 나왔다. 그러나 사진 찍기를 즐거워 하며 배웠더니 이런 사진을 얻게 된다.
옛 성현의 교훈/고대 페르시아 성전
네가 아는 모든 걸을 말하지 말라
안다고 모든 것을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법이니라.
네가 들은 모든 것을 말하지 말라
들었다고 모든 것을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들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법이니라.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쓰지 말라
자기가 소유한 것이라고 모든 것을 쓰는 사람은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쓰는 법이니라.
네가 본 모든 것을 탐하지 말라
눈으로 보았다고 모든 것을 탐하는 사람은
실제로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는 법이니라.
우리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가만히 응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쌓이는 적폐가 있다. 그게 바로 오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편견이 여러 의견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해답이라고 여기는 착각을 한다. '위대한 개인'은 그런 자신을 깨우치는 공부를 통해서만 오만이라는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런 착각을 피하는 길이 제3자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내가 너무 오만한지 나를 되돌아 본다.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겐 한 가지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오만 때문에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비극공연을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은 아는데, 정작 주인공인 자신만 모른다. 그것이 오만이다. '위대한 개인'은, 남들이 보기에 소위 스펙이 좋은 인간이 아니라, 흠모하는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을 위해 매일매일 '지금-여기서' 연습하는, 아니 훈련하는 인간이다. 스펙이 좋은 인간들은 대부분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고, 그런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안타까운 인간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력, 경제력, 권력 등을 남들과 공유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자신과 자신의 식구를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런 사람에겐 매력이 없다. 진부하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매력이, 자신이 가진 보물을 남들과 함께 나눌 때, 배가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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