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너무 많이 소유하여 삶이 편안하면 방심(放心)하게 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0. 19:47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구체적인 것을 소유하기 보다 그것들을 설명하는 능력을 가진 자를 우리는 '학자(學者)'라고 부른다. 그들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 세계를 다루는 '사유'가 더 강하다. 많은 재산을 가진 자보다 추상 세계를 설명하고 은유(隱喩, metaphore) 할 줄 아는 자들이 더 힘이 세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다. 너무 많이 소유하여 삶이 편안하면 방심(放心)하게 된다. 방심하면 안주하고 방탕 해진다. 반면 시련이나 위기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더욱 옹골찬 인간으로 빚어진다. 가을 들판 열매들이 옹골차다. 도자기도 마찬가지이다. 도자기도 수천도의 온도를 견디고 나서야 좋은 것이 된다. 꽃도 마찬가지이다. 온실 속 화초보다 온갖 위험 속에 자란 야생초가 더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그리고 중앙은 퇴행하게 마련이며, 변방에 있던 세력이 다시 중심부를 장악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토인비는 말했다. 신영복 교수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변방인, 주변인을 강조했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 창조,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변방에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가려고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방에 있다면 오히려 기회이다.

인문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밥을 주지 못해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갇히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유의 시선이 높으면, 효용(效用)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을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한다. 탁월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쓸모 없음의 쓸모'를 본다.

오늘 저녁은 '동네에서 놀고' 공동체를 회복하며 '다르게 살기'로 마음 먹은 지 몇 개월 만에 두 가지 행사를 하게 되었다. 하나는 <신성마을 리빙랩>의 주관 아래, "놀이공간 개선 프로젝트 리빙랩, 주막놀이터 축제"를 오후에 하고, 저녁에는 뱡셮62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과학을 지향하는 인문학 &인문학을 지향하는 과학"의 릴레이 강연과 Q&A를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 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 연휴에 읽은 말레네 뤼달의 『덴마크 사람들 처럼』에서 저자는 자신의 "행복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즉 '네가 잘 지내야 나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마음 먹는 일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세금을 기꺼이 내며 복지 국가에 애착이 크다. 모두가 나눔에 함께 참여하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절세(세금을 절약함)"라는 말을 듣는다. 덴마크 사람들 중 61%는 절세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정부가 교육, 건강, 교통 등 공공 서비스를 위해서 세금을 잘 사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민들 간의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그래 인문학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신뢰(信賴)는 동양에서 흔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거론되는 다섯가지 덕목(德目)이다. 이 '오덕'은 활을 쏘고, 창고를 살피고, 전투를 하고, 결제를 하는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신뢰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눈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용(無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능적인 거의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결국 대용(大用)을 이루게 한다. 그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우리 사회 전반에 신뢰가 무너졌다. 사회의 리더들이 자기가 한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나무처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신뢰를 가지고, 보이고 만져지는 기능을 압도할 수 있는 성숙이 필요하다. 그 성숙은 인문학에서 나온다. 여기서 인문학은 인문학의 결과물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의식)를 보편의 높이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철학(지혜를 사랑하는 것)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의 위대함은 질문하는 데서 비롯된다. 학문에서 '學'은 보거나 만질 수 없다. 이처럼 지식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추상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눈에 보고 만져지는 사물을 갖는 것 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능력은 다음과 같이 3 단계로 나뉜다.
▪ 구체적인 물건을 갖고, 그걸 말하는 사람- 겉모습만 보고 말하는, 보이는 것만 말하는 사람의 능력
▪ 그 이면을 설명하는 사람, 또는 더 잘 설명하는 사람의 능력
▪ 설명 자체의 원리나 법칙을 가진 사람의 능력 - 원리나 법칙이란 이 세계를 더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세계를 설명해 놓은 관념, 부호, 기호, 장치가 지식이다. 높은 지식일수록 현실에 대한 통제력이 더 크다.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인 것만 보고, 생을 마감한다.

나무처럼/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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