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 안회의 삶을 묘사한 말, "학위인사(學爲人師) 행위세범(行爲世範)" 를 잊지않고 있다. 이 말은 '학문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야 하고, 행실은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로 해석된다. 북경사범대학의 교훈이기도 하다. 내가 나온 사범대학의 '사범(師範)'의 어원이다. 좀 더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배워서 남의 선생이 되고, 배운 바를 실천하여 세상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도 실천하고 싶다. 사(師)자 가 들어가는 사람은 학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행실에 있어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이라 생각한다.
TMI인지 모르지만, '사'자로 끝나는 직업들을 한자(漢字)로 썼을 경우에는 판사(判事), 검사(檢事), 변호사(辯護士), 의사(醫師), 박사(博士),대사(大使)등으로 '사'라는 글자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 일 사(事) : 판사(判事), 검사(檢事), 도지사(道知事) 등이 있다. 변호사만을 제외하고 죄를 다루는 공공 영역에는 두루 일 사(事)를 쓴다. 사(事)에는 '다스리다.' 라는 뜻 같다.
- 선비 사(士) : 변호사(辯護士), 박사(博士), 간호사(看護士) 등이 있다. 여기서 '사(士)는 '전문 직업인'을 존중하는 뜻으로 쓰인다. 학위, 면허전문직, 보통 특정 분야 뒤에 붙는 상담사, 지도사에 사(士)가 붙는다.
- 보낼 (使) : 대사(大使), 칙사(勅使) 등이 있다. 사(使)에는 심부름꾼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 스승 사(師) : 의사(醫師), 약사(藥師), 교사(敎師), 법사(法師) 목사(牧師) 등이 있다.
사(師)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고귀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단어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의사(醫師)와 약사(藥師)도 '스승 사'의 계열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냥 생각한다면 전문 직업인이니까 '선비 사(士)'의 계열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사와 약사에 선비 사(士)를 쓰지 않고 스승 사(師)를 쓴다. 의사와 목사에게 스승 사자를 붙이는 이유는 생명을 다루고 공동체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사(師) 직업의 일탈이 아쉽다.
최동석(인사조직연구소 소장)이라는 분이 그랬다. "과거에는 군대 지휘부와 중앙정보부 지휘부가 엘리트였다. 지금은 전교 1등을 해본 판사들, 검사들, 의사들이 엘리트가 되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괴물로 자라났다." "우리의 교육은 엘리트라는 괴물을 양산해왔고, 우리의 구조와 시스템은 괴물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왔다." "교육혁명과 함께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코로나-19로 만남과 외출이 적어지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또한 수시로 눈이 아프다는 핑계로 낮잠을 자니,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잣다. 오늘 아침은 태풍으로 내리는 빗소리에 깼다. 지금도 엄청나게 비가 내린다. 그래 오늘 아침은 천양희 시인의 <비>를 공유한다. 오늘 아침 비처럼, 나도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새상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간다.
비/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지난 몇 주전부터 나도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한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주제이다. 특히 전공의와 전임의들이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에 무기한 집단 휴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교육혁명 정말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사범대학을 나왔지만, 학교 현장을 일찍 떠나, 프랑스 유학을 하고 왔는데, 교육 현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파리 목숨처럼, 강의하고 또 잘리고, 강의하고 잘리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거의 다 정리하고 새로운 교육 문법을 만들어 보려고 마을 공동체 <우리마을대학>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교육은 학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을 통해 인지적 성장을 견인하며, 진로준비와 사회적 소양 함양을 통해 어엿한 직업인 및 민주적 시민을 키워내야 한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교육, 성숙한 민주주의자를ㄹㅇ 키우는 교육을 할 때이다. 존엄이란 프랑스어 라 디니떼 (la dignite), 영어로 디그니티(dignity)라 하는 데, 이 말의 뜻은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는 말이다.
반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능력 우선주의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했고, 이를 존엄주의(dignocracy)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월성 교육에서 존엄성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독일처럼 경쟁 교육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한다고 김누리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쟁을 멈추어야, 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육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거나, 사회적 정의가 유리되며, 학벌계급사회가 고착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인적인 경쟁교육 때문에 아이들이 기형 화되고, 우리의 삶이 황폐화되었다. 김교수에 의하면, 우리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심한 나라가 된 것은 역사적, 사회적 이유가 다음과 같이 있다고 김누리 교수는 주장했다. 나도 동의한다.
• 정신사적인 이유: 일제 시대를 풍미하던 사회적 다위니즘(생물계에서 발견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인간사회도 지배하기 때문에 우수한 자가 열등한 자를 정복한다는 이 생각은 바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불평등 및 전쟁과 식민지 정복을 합리화 하려는 동기에서 생겨나게 된다.) 사상이 해방 후 미국식 자유시장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경쟁절대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 불평등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은 세계 최고 강도의 경쟁을 초래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경쟁이 심한 법이다.
• 전통적 지배질서(establishment)가 붕괴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극히 평등지향적인 사회가 생겨났지만, 이 평등의 들판에서 학벌이라는 괴물이 새로운 신분적 대체물이 됨에 따라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학벌계급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 나라는 '30-50 클럽'에 속한 7개의 나라 중에서 제국주의의 과거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래 우리 나라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에서 새로운 영감과 희망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나라이다. 조건이 있다. 우리가 교육혁명을 통하여 '경쟁 없는 교육'을 실현하고 학벌 계급사회를 타파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가장 역동적인 나라, 가장 멋진 공동체로 부상할 수 있다. 김누리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교육혁명이 이 '고단한 사회'에서 '고상한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것이 일상에서 이루어야 할 민주화이다.
김교수는 교육 혁명으로 다음 4가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대학 입시 폐지=대입자격 고사화
• 대학 서열 폐지=대학통합네트워크
• 대학 등록금 폐지=대학 무상교육
• 특권학교 폐지=고교 평준화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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