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왜 우리 사회는 자기 착취를 하는 과로 사회가 되었는가?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18. 11:05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축적된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은은한 활력을 기다릴 여유는 대개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우리 사회가 끝 없는 경쟁과 승자독식 비정상적인 사회가 된 원인을 김누리 교수는 68혁명의 부재 때문으로 보았다. 그 부재는 우리 사회가 인권 감수성의 부재 현상과 지나친 소비주의 문화로 이루어진 권위주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오늘 아침도 그의 책,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김누리 교수는 또 우리 사회를 '자기 착취 사회'로 규정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김영민 교수는 "과로 사회"라고 말한다. 몇 년 전에는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라는 책을 이용해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로 알려져 있었는 데, 이젠 그 것을 넘어 이젠 "과로 사회"가 되었다. 김영민 교수의 주장을 좀 들어본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에 의하면, 한국은 과로에 젖은 사회다. 정도 이상으로 과로하다 보니, 몸과 마음 양면으로 보양식을 찾는데 혈안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음의 보양식을 찾아, 어려운 인생에 쉬운 답을 주는 소위 사회적 멘토의 강연장에 간다. 그리고 육체의 보양식을 찾아서는 고성능 영양제를 찾거나 동네 건강원을 방문한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축적된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은은한 활력을 기다릴 여유는 대개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김교수님의 글을 공유한다. "꾸준한 마음의 근육 단련을 통해 정교한 생각의 힘을 얻을 여유는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바쁘고 지친 사람들은 몇 번의 인문학 강연과 몇 번의 보약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쟁취해야만 한다. 멋진 표현이다. 스트레스로 정신의 방광이 터져 나가는 상황에서 한 입 베어 물면, 좁아 터진 방광을 떠나는 오줌처럼 스트레스가 배출되고, 또 한 주를 살아갈 정력이 샘솟게 되는 보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한국에 성행하는 많은 자칭 멘토의 강연과 건강원과 개소주 집은 후다닥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닮았다."

어제는 소위 8,15 광복절의 대체공휴일로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지만 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냈다. 일상을 지배한다는 마음으로, 휴일이었지만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도 했고, 광복절 답게 저녁 식사 후는 영화 <봉오동전투>를 집에서 보았다. 주변에서는 광복회장의 광복절 축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축사가 문제가 된 것은 식민 통치에 얽힌 과거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고 남은 과제를 풀기 위해 일본에 던져온 통상적 메시지 대신 우리 안에 오랫동안 묵혀온 예민한 문제를 끄집어 공론화했기 때문이다. 요즈음 내가 고민하는 우리 사회의 개혁과 맥을 같이 한다.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이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화폐 속의 인물에 독립운동가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을 '광복하라!'"는 광복회장의 기념사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어느 한 곳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없다고 한다.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식민 통치에 부역한 자들이 나라를 되찾은 지 75년이 지나도록 사과는 커녕 고개를 쳐들고 부귀영화를 누려온 이 기막힌 현실이 모든 것을 중명하고 있다. 친일의 대가로 자자손손 재력을 갖고 권력을 쥔 친일반민족세력들은 광복된 나라를 통합으로 이끌지 않고 다시 분열시키는 기념사라고 비난들을 한다. 다 도둑이 제발 저리는 꼴이다.

이어진 대통령의 경축사에서는 나라의 광복을 넘어서는 개인의 광복을 언급하면서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를 만들자고 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모든 격차와 불평등을 줄여 나가는 것"이라 했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진정한 광복"이라고 했다. 어제 저녁에 영화를 보면서, 그 고통을 겪으셨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좀 눈물겨운 조태일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아침 사진은 '닭의 장풀'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달개비'로 라고 부른다. 강현덕 시인의 <장마>에 달개비가 나온다. "바람에 누운/풀잎 위로/바쁜 물들이 지나간다//물 속에서/더 짙어진/달개비의 푸른 눈썹//세상은/화해의 손을/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어제 오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길에 달개비가 지천이었다. 화해하라고 흔드는 손이었구나!

어머니의 처녀 적/조태일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누에가 걸쳤던 새하얀 비단실 뽑아 올리면
펄펄 끓는 물 위에
기름 번지르르한 노오란 번데기가
다투어 둥둥 떠올랐다

해는 왜 그리 길고
배는 왜 그리 고픈가
현장 감독의 눈을 피해 졸고
졸면서 번데기로 배를 채웠다

힘없어 애 못 낳는 여자
한 말만 먹으면 애를 낳고 만다는
그 번데기 때문인지

열일곱에 서른다섯 노총각 스님에게
업혀 와서 칠 남매 낳으신 뒤에도
어머님은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6ㆍ25가 끝난 한참 후에까지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라는 인식이 익어갈 때, 적절하게 쉬운 말로 우리 현대사회의 아픈 부분을 지적하면서, 대안을 그리고 있는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어 가며 생각을 공유한다. 오늘의 질문은 '왜 우리 사회는 자기 착취를 하는 과로 사회가 되었는가'이다.

옛날에는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노예를 착취하였다.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도록 구조 시스템이 만들어 졌다. 김누리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 채찍을 휘드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 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 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곳이 우리 사회라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타인이 착취를 하는 경우에는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착취하는 자에 대한 저항 의식이 생겼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내 잘못 이라는' 또는 '내가 게을러서 라는' 죄의식과 함께 자기를 비난하고 착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OECO 자살 1위가 된 것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살 사회'로 굳어진 것도 바로 우리 사회가 '자기 착취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부단히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고 신념 화하면서 어떻게 생각을 당하고 있는지 사회적, 심리적 구조를 잘 들여 다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을 당하며, 자기 착취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면 이 사회를 변혁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기 착취는 누구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행복감을 느낄 권리를 빼앗아 간다. 일상에 행복감을 느끼려고 하면,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지금 이럴 때야? 지금 너 뭐하고 있니?"하면서 내가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닌가, 내가 너무 뒤처지지는 않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게 자기착취를 하게 하는 기제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는 끊임 없이 자기를 착취하도록 요구한다. 게다가 자기 착취의 결과 생기는 온갖 불행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개인을 억압하는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 불행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으며, 다시 또 개인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이상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68혁명 당시 가장 유명한 구호 중 하나는 "정치 투쟁의 최전선은 내 안에 있다"라는 거였다. 이 말은 "정치 투쟁의 최전선"은 나를 억압하는 외적인 질서, 즉 정치 권력 혹은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나를 억압하거나 노예로 만드는 대상은 '밖'에,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것은 '나'일까, 아니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자의 것일까 질문해 보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 내가 느끼는 감정,
* 내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 내가 품고 있는 욕망,
* 내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

68혁명 세대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김교수는 이를 '정체성의 정치'라고 부른다. 그 말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노예 감독관은 내 안에 있다' 등의 구호들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생각에 영향을 준 사람이 허버트 마르쿠제의 책 『일차원적 인간』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

김교수에 의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 자본이 주입한 논리에 따르며 끊임 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안'에 있는 노예 감독관과 정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나의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까지 다시 분해하고, 걸러내어, 점검하고, 분리하고, 조합해야 한다.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은 '물리적 권위'에서 '윤리적 권위'로, 다시 '익명의 권위로 발전한다. 우리들의 권위와 권력은 물리적 폭력에 기초한 외적인 것었다. 그 후 권위와 권력은 내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게 '도덕이나 윤리적 권위'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 강력한 권위는 '익명의 권위'이다. 익명의 다수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인식, 즉 상식, 여론 같은 것이 '익명의 권위'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폭력을 통한 지배에서 가치를 통한 지배로, 다시 상식이라고 불리는 '사물의 질서'를 통한 지배로, 지배의 역사가 변해온 것이다. 이 모두는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지배자들이 나의 내면에 심어 놓은 것이고, 이것을 신념 화하면서 우리는 완전한 노예로 길들여 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기 착취'라는 놀라운 우리 사회의 놀라운 전도현상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그래 인문학의 핵심이 모든 권위에 대한 저항이다. 일상에서 그런 저항을 실천하고, 삶 속에서 구현하는 일을 나는 인문학을 넘어, '인문운동'이라 정의한다. 그래 나는 인문학자이기 보다 인문운동을 하고 싶어 나를 인문운동가로 규정하고 아침마다 글을 쓰는 것이다. 이건 나의 꿈이다. 인문운동가가 하는 일은 사유하고, 생각을 생산해 내는 일이다. 그건 기존의 문법을 넘어 새로운 문법을 만들려는 도전과 모험이고, 정해진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고,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궁금해 하는 추상과 상상이다. 이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다. 그래 인문운동가는 반역자이다. 반역자는 정해져 굳은 것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그것과 결별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꿈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꿈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가능해 보이면 꿈이 아니라,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이다. 인문학 이야기는 내일 더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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