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100세 시대 우리 사회의 교육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6. 11:28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우리 동네, 내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마을 공동체 <우리 마을대학>을 발족하고 시작하는 첫 사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끼리 벌써 여러 번 만나 비전을 짜고, 역량 강화를 위해 모였었다. 그러나 첫 사업이 공방(studio)에서 동네 주민들을 모시고 공개 수업을 하는 날이다. 우리마을 7 대학 <아리공방>에서 천연 DIY: 천연비누, 천연화장품 그리고 아로마 테라피의 세계를 만나는 강좌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언젠가, 나는 <100세 시대, '학생’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는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칼럼을 잘 메모해 둔 적이 있다. 오늘 그걸 다시 꺼내 읽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 <우리마을대학>이라는 공동체를 비영리단체로 세무서에 등록하여 고유번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그 글에서 "현재 한국인은 83세 정도는 산다. ‘100세 시대’가 더 이상 꿈은 아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최근 코로나-19와 이상 기후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주변을 둘러 보면, 정말로 100세 시대가 맞는 것 같다.

물론 100세 인생의 도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80까지도 지겨운데(사실 외로운데) 100세까지 살아서 뭐하나, 100세를 살면 80세까지는 일해야 먹고살 텐데 힘들어서 어쩌나….’ 노인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 나올 만한 반응이긴 하겠지만 한번 늘어나기 시작한 수명을 억지로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1명 이하인 '초 저출산' 국가이기도 해서 생산가능인구(만 15~64세)의 급감이 큰  걱정거리이다. 실제로 매년 생산가능인구가 10만~20만명씩 감소하고 있는데 이 저출산·고령화의 흐름에 잘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 현 사회 체계는 붕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진화사 측면에서 100세 시대는 새로운 국면이지만,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의 60세는 건강 면에서 과거의 40대와 유사하면서 경험 면에서는 20년치가 더 많다. 사회 구조가 은퇴를 강요할 뿐이지 더 유능하게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밤 사이에 굵은 비가 내려, 많은 염려를 했는데, 아침에는 비가 잦아 들었다.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꾼다'고 좋은 문장을 페이스북 대문에 달고 있어 인상적인, 내가 좋아하는 홍준기 전 의원의 포스팅에서 내 마음을 들켰다. 저 속절없이 내리는 장맛비는 "땅의 울음이 하늘을 휘돌아 다시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통곡의 소리", "지금 당장 기후변화의 대응에 나서라는 간절한 호소", "평생토록 일궈 온 모든 것도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일깨우는 절규", "살아 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임을 알게하는 죽비의 울림"이란다. 통곡의 소리, 간절한 호소, 일깨우는 절규, 죽비의 울림 소리. 그렇다. "굵어져 가는 빗 소리에 깊어져 가는 시름은 속절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소크라테스를 기억했다. 그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이 잠들지 않고 최고의 경주마가 되도록 괴롭히고 훈련시키는 '등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소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몇 마디 말을  궁색하게 지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셨다. 인문운동가로 나선 나도, 소크라테스처럼, 소나 말의 꼬리에 붙어 있는 '등에'이고 싶다. 그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쓰고 공유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강현덕 시인의 <장마>이다. 이 시를 택한 것은 시인은 장맛비를 '화해의 손짓"으로 읽은 것이 마음에 들어서 이다. 이 비 그치면,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의 나무처럼, 다시 또 시작하는 것이다.

장마 /강현덕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100세 시대 우리 사회의 교육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한다. 『100세 인생』의 저자인 런던정경대학의 그래튼 교수에 따르면, ‘교육→일→은퇴’라는 3단계 인생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제 “전일제 학생, 풀타임 직장인, 여생 은퇴자라는 용어는 사라질 것”이며, 이 세 단계가 섞여 있는 복합적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 시스템의 특징은 교육을 늘 출발선에만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장교수는 교육이라는 말을 재정의하자고 한다.

장교수는 그 일이야 말로 고령화 시대를 위한 첫 미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 나도 작년부터 마을 공동체 <우리마을대학>을 구상해 왔던 것이다. 교육 대상을 재설정하는 취지이다. 현재 우리 교육 시스템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리고 대학 교육을 위해서 교육 예산의 대부분을 지출한다. 그리고 20세까지만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60년은 알아서 하라고 한다. 사실상 우리에게 ‘교육비’란 3~23세에만 지출하는 교육비다. 그 이후 세 배의 기간(60년) 동안 인류는 교육으로부터 완전히 방치되어 있다. 현재 인류의 고등교육은 기껏해야 첫 직장을 잡는 데 유용할 뿐이다.

우리의  주변의 40대 이후(40플러스)의 사람들은 교육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따라서 인구통계적 변화만 보더라도 앞으로는 40플러스를 위한 교육 수요가 더욱 크고 강력해질 것이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기술 리터러시(문해력)의 세대 간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릴 것이기에 적응 교육이 가장 절실한 연령층은 40플러스다.

이쯤 되면 ‘평생교육이나 평생학습이 이미 이뤄지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이것은 대학 교육의 일부를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수준이다. 여전히 대학을 정점에 둔 교육 관행이다. 평생학습에 적극적인 분들이 찾는 무크(온라인 대중 공개수업)도 한계가 많다. 함께 배운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공방(studio)가 필요하다.

대학 제도는 길게는 1000년, 짧게는 500년 전에 유럽에서 시작된 시스템이다. 그때 교육 대상의 평균수명은 길어야 40세 정도였다. 즉 20세까지 배우고 20년을 활용하다 죽음을 맞는 식이었고, 이것도 소수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 특권이 확대되어 적어도 지금 한국은 약 70%가 대학을 간다. 그리고 각 가정의 교육비의 거의 전부와 국가 교육 재정의 대부분이 대학을 정점으로 사용된다. 마치 대학 졸업 후 20년만 살다 죽을 것처럼 교육비를 대학에 소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 관행은 명백한 퇴행이다. 교육 자원을 생애의 여러 단계로 분산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100세까지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실제 현재 우리 대학에 강의를 가면, 과식(過識)으로 소화불량인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아무리 중요한 지식과 통찰을 전달해도 시큰둥하다. 배움의 자세가 안된 학생들 때문이다. 반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식과 지혜에 갈급(渴急) 해 찾아온 40플러스의 눈망울들은 오히려 초롱초롱하다. 이 잊혀진 존재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흡수하고 응용할 수 있는 진짜 학생들이다.  국가와 대학 그리고 가정이 20대까지 쓰는 교육 예산의 10분의 1이라도 40플러스에게 이젠 써야 한다.

목마른 그들에게 생수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자신 뿐 아니라 자녀, 그리고 우리 사회도 돌아보게 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청소년을 너무 편애했다. 어릴수록 교육 효과가 클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해봐야 한다. 책을 읽으면, 심지어 1주일만 공부를 해도, 어른의 뇌는 변한다. 뇌가소성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중년의 뇌’의 탁월함을 입증한다. ‘60이 넘어도’ 배울 수 있고, 청년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누가 학생인지를 재고해야 할 때다.

뇌가소성은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인간의 두뇌가 경험에 의해 변화되는 능력을 말한다. 즉 뇌가 성형적(plastic)이고 순응성이 있다(mollable)는 것이다. 이러한 두뇌의 특징은 현대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우리의 뇌는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 스스로를 한계내에서 재설계할 수 있다는 능력을 진화 시켜왔다. 해부학적 뇌 구조의 가소성 덕분에 개개인의 활동에 적합하도록 뇌를 맞춤 설계를 하는 게 가능해 졌다.

쉽게 말해, 뇌가소성이란 반복된 경험이 뇌의 구조를 바꾼다는 말이다. 반복하면 할수록 뇌의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어떠 일을 계속 연습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의식적으로 하루에 세 번 농담을 던지는 행동을 계속하면 뇌의 신경경로가 농담을 잘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재 구조화된다. 그렇게 일단 뇌가 바뀌면 사람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유머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생활에서 이를 실천하면 사십 년 뒤에 내가 농담을 잘하는 할아버지가 된다. 점점 우스워지는 사람이 있을 뿐, 날 때부터 우스운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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