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반짝인다고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27. 13:39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계속 내리는 장마 비로 꽃들도 힘들어 한다. 차라리 햇살이 따가운 게 낫다. 습한 것이 살아 있는 모든 걸 힘들게 한다. 그러나 이 고통이 열매를 더 튼실하게 하는 거라면, 몇 일 정도는 참을 일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땅끝마을까지 걷기>의 계획에 따라 남원으로 기차여행을 간다. 기차 타러 가기 전에, 몇 일전 부터 해오던 인문정신 이야기 중, 오늘 아침은 세 번째로 플라톤과 함께 한다. 우리는 그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배운다. "반짝인다고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가 플라톤 사상 체계이다. 보이는 것 너머에 어떤 초월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저작이 『국가론Politeia)』이다. 이 책을 한 줄로 말하면,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함이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을 정의로 말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정의'란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은 아테네가 아니라, 스파르타였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국가는 스파르타에서 처럼 군주, 즉 통치자가 늘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 수호자는 용기가 필요하고, 국민은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통치자와 수호자와 국민이 각각의 위치를 지키고 저마다 갖춰야 할 덕목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한 국가의 '올바름'이고,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 플라톤 국가론이다.

이 국가론은 '바른 나'를 위해서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덕목으로 확대된다. 이는 곧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상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그는 『국가론』에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아주 고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고뇌의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신의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게 '진선미(眞善美)'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 이데아가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이성)을 낳고, 지성과 진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우리가 고뇌 끝에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그 이데아의 세계를 늘 생각하고 추구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짝인다고 전부 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우리는 잘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오지만, 태양을 보지 못한다. 눈부신 태양을 볼 용기가 없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이게 보통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반짝이는 것을 그냥 금이라고 믿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그 용기는 어떻게 생길까? 갈망을 통해서이다.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하면,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게 그리스 인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 갈망은 '에로스'를 통해 발현된다. 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을 번역하면, '숭고한 사랑'이다. 에로스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좀 다르다. 타자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다. 숭고(崇高)란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이데아를 향한 갈망을 통해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그치면 플라톤의 사상은 단순한 용기에 대한 덕목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데아를 한 번 본 사람에게 '에로스'가 깃들어 숭고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면, 동굴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환영을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게 이데아의 힘이다. 자기만 이데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갈망과 에로스(숭고한 사랑)가 생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숭고한 사랑의 감정으로 동굴 안의 쇠사슬에 묶인 채 그림자를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것이 이데아의 힘이고, 이 힘으로 욕을 먹더라도 그들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힘이 에로스(사랑)인 것이다.

에로스 힘의 작동은 내가 이데아를 보려는 용기를 심어주고, 다시 동굴 안의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힘이다. 이게 플라톤의 에로스론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그 다음"은 말하지 않겠다.

산비둘기/장 콕토

산비둘기 두 마리가
정다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차마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장_콕토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 '한순간에(suddenly, 불현듯이-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 느닷없이)' 낯선 현실을 만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갑자기/한순간에',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다. 이 순간이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 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래야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카이로스적 시간이다. 이런 자기 변화는 모멘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소중한 순간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면,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아야 한다. 나를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결연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속박하는 사슬을 끊고 자신들이 본 것들 허상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이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과 같다.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