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리스가 두 번째로 남긴 인문학적 유산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숙고하는 삶'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26. 13:28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난 낮부터 반가운 분들이 찾아 와, '주'님과 함께 보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그리스 정신'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그리스가 두 번째로 남긴 인문학적 유산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숙고하는 삶'이다. 숙고(熟考)란 '곰곰이 생각함, 깊이 고려함'이란 의미이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도록 고찰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들어간다. '깊고, 길게' '검토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숙(熟)'자가 '익다'라는 말이고, 고(考)는 '곰곰이, 오래 생각한다.'란 말이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숙고하는 삶이란 말 대신 검토하는 삶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n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인용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언제나 탁월함에 대해 논하고,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 인간이란
▪ 늘 탁월함을 생각하고,
▪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숙고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성찰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탁월함이라는 말이 탁 와 닿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높은 시선을 지닌다'는 것 같다.

'탁월(卓越)하다'는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로 사전은 정의한다. 탁월함을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덕(德)이다. 내가 알기로 '덕'은 도(道)가 실제 삶에 구현된 것이다. 이를 그리스어로는 아레테(arrete)라고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최대로 발현된 것을 아레테, 탁월함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탁월함은 그냥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각각에게 해당되는
▪ 짜임새 있는 배열(taxis)-질서
▪ 올바름(orthotes)
▪ 기술(techne)을 통해서 탁월해 진다고 한다.

탁월함에 왜 질서가 필요한가? 질서에서 절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절제에서 나온다. 좋음(훌륭함)과 탁월함(덕)은 다르다. 탁월함은 'GRIT'에서 나온다. '그리트'란 열정적 끈기의 힘(투지와 기개)에서 나온다. GRIT는 determination and courage(결단력과 용기)이다. 재능보다 노력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으로 표현한다. 성취+재능X노력의 제곱이다.

아레테는 어떤 종류의 탁월성 혹은 도덕적 미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이해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는 참된 목적이나 개인의 잠재된 가능성의 실현과 관계된 최상의 우수성을 가리킨다.

그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숙고의 대상은 무엇인가?
▪ 그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가 탈레스의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라는 격언을 보았다. 그는 이 격언을 통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성찰하겠다는 삶의 자세를 다짐한다.
▪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인문정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나라면,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답은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배우는 자세가 생기고, 죽을 때까지 숙고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숙고하는 삶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 쉽지 않다. 방심(放心)하면, 관성으로 삶이 훌쩍 흘러간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을 묻지 않으면, 우린 자꾸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눈치를 보게 된다. 그 질문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질문을 한 다음에는 그 대답을 모색하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모색하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살고 싶다.

우물/신흥식

길을 가다 우물을 보면
깊이가 궁금하여
돌멩이를 던져 봅니다.
풍덩,
소리를 듣고서야 안심이 됩니다.

오늘 문득
풍덩,

그 소리가 그리워
돌멩이 하나,
그대 가슴에 던져 봅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신흥식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PS
그래 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 성장이다.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실제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부 구경만 한다. 배움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힘'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힘'은 그것을 다룰 수 있도록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강의를 듣거나 누군가로부터 배우면, 그 배운 것을 글로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익힘'을 반복하면 '나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두고 '자유(自由)'라고 불렀다. 그러니 배움의 목적은 결국 '자유'를 위해서이다. 사실 자유는 그냥 주워 지지 않는다. 내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배워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그 때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로운 나'는 누구인가?를 쉼 없이 또 성찰해야 한다. 왜? 뭐 좀 할 줄 안다면, 우리 인간은 오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진짜 무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고 무리하지 않으며, 나를 배려하고 나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다. 즉 멈출 줄 알고, 현실을 잘 직시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제의 한도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그만큼만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지혜롭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