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기 위해서는 주류 사회에서 고독하게 돌아서는 것이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린 지금 시끄러운 일상에서 좀 이탈한 고독이 필요한 때이고, 많은 이가 고독하게 앉아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힘을 길러내 어야 우리 사회가 성숙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떼지어서 다닌다. 카페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독은 스스로를 홀로 두며 스스로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각을 이루는 자리이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주류 사회에서 고독하게 돌아서는 것이다. 이 말은 몇 년 전에 대만 작가 장쉰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최근 나는 한 사람의 죽음 속에서 고독을 보았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것은 고독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고독이라는 아침의 화두가 되었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장과 이에 부응하는 언론 미디어이다. 그래 가급적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가짜 뉴스에 속곤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SNS는 점점 우리를 소비로써 증명하도록 부추긴다. 그래 개인의 사고가 중요한 이유이다. 저항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지금 우리가 대항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지금 일상의 여러 요소들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체제이고, 그 자체가 바로 권위적인 압박이다. 대안이라면? 주류 사회에서 고독하게 돌아서는 것이다. 고독해 진다면, 혼자 놀 줄 안다면, 주류 사회의 쏠림을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소비형식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려면 고독으로 내면의 힘을 단련하여야 한다.
장쉰은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 문학평론가로 '대만 문학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는 『고독육강(이야기가 있는)』이 소개되었다.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우리는 마음 붙이지 못하고 쳇바퀴 따라 돌며 일상을 만들어간다. 외로움에 주눅 든 채 타인의 선택에 눈치껏 기대며 하루를 보낸다. 대만 작가 장쉰은 고독으로 살아갈 힘을 키우자고 설득한다. 고독은 스스로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장쉰은 소설로 청년들에게 세상과 마주하도록 눈을 뜨게 했고, 장년들에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직시하도록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는 지금 세대를 초월해서 SNS에 매달린다. 왜? 외로워서, 관음증과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려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컵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손으로 물을 먹었다. 그러니 다시 컵이 없으면 손으로 물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 물질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기계나 물질 또는 도구 없이도 제 몸으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이다. 거기다 모든 것을 걸면 안 된다. 스마트 폰 없이도 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젠 너무 멀리 왔다. 스마트폰이 우리들의 오장육부에 하나를 더 보태 '오장 칠부'의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대의 최재봉 교수는 '포노 사피엔스(스마트폰인 낳은 신 인류,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라는 말도 만들어 냈다. 포노 사피엔스들은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세대이다. 나도 다소 그런 편이다.
스마트 폰은 소비하는 컵이나 의자와는 다르다. 그건 관계를 맺는 도구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SNS 때문에 사람들의 관계는 더 가벼워지고, 더 외로워졌다. 사람은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고독은 인간의 본질이다. 본래 고독하게 살고 고독하게 죽는다. 사실 고독 속으로 들어가면 고독의 한가운데서 채워지는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서 바쁘게 밀려다니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은 이해 못 할 이야기이다. 고독의 시간은 자신과의 대화가 되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고독한 시간에 자기 자신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한자로 고독(孤獨)은 외로울 고(孤)와 홀로 독(獨)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주류 사회로부터 떠나 고독의 힘을 단련시킨다.' 말은 쉽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자기 자신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용기와 힘을 기르려면, 바깥세상이 계속 변하고 정보가 넘쳐나도 평온하게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고독을 두려워 할 필요 없다. 두려움은 외로움과 황량함을 부른다. 지금 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면 된다. Bon Courage! (힘내, 용기 가져!) 몇 일간 비가 내린다. 해를 보기가 힘들다. 그래 풀들이 힘들어 한다. 그렇지만, 풀들은 잘 견디고 있다. 잠깐 비가 그친 사이, 주말 농장에 다녀왔다. 풀들이 다 쓰러져 있다. 그렇지만 곧 일어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수영 시인의 <풀>을 공유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농장 가는 길의 한 집 정원을 찍은 것이다. 나리 꽃은 속절없이 요염하다.
풀/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강한 사회는 상처 입은 모든 이가 함께 존중 받는 곳이어야 한다. 고아나 독거노인처럼 소외된 이들도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엄한 위치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이 일상이 된 오늘날,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마저 쓸쓸함을 채워 주기보다 서러움을 불러 올 때가 많다. 도시에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떨쳐 내기가 참 어렵다. 그렇다고 다 버리고 산 속으로 갈 수도 없다.
인간은 원래가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행복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 우리는 자신과 고독한 시간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외부에서 추구할 때,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다. 그리고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단지 주고받는 관계로 변할 뿐이다. 세상은 자신에게 익숙해 지기 전에 빠르게 바뀐다. 이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할지? 이 장사, 이 업종을 계속 해야 할지? 전전긍긍한다. 나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도 전에 세상은 변한다.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자기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간을 온전히 느낌으로써 만이 우리는 세상에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과 연결된다. 느낌과 앎은 다르다. "나우니스(nowness 현재성)'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현재가 이어지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간을 말한다. 순간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경험한 것과같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면 모든 사람이 자기 세상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신의 내면과 아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반면 너무 적게 느낀다. 그래 감각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렇게 느끼는 감각은 천천히 약해져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만큼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의 답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과의 답도 있지만, 과정의 답도 있다. 살면서, 과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균형이다.
느낌의 힘을 우리는 감성(感性)이라고 한다. 사전에서 감성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이성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외부의 대상을 오관(五官, 오감각)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펴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말하는 철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감성은 감각하는 힘이다. 감각하는 것을 우리는 정확히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감각된 것을 분류해야 한다, 그걸 우리는 지각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보면 감성은 가속 페달이고, 이성은 브레이크에 해당한다. 그런데 차를 운전해 보면, 가속 페달을 밟지 않고, 브레이크를 사용하면 동네에서 차를 몰면 차가 잘 나가지 못한다. 가끔씩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밟아주어 야만 차가 잘 나가듯이, 우리의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감성의 제어 역할이 이성인데,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만족감을, 외로움은 목마름으로 이어진다.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질 수 있다. 생각을 멈추고, 침묵하면, 내 안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속도의 관성을 끊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 가급적 우리는 느리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서둘러 해석하기 전에 직접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거다. 고독(solitude)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안해지는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이다. 외로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고독 속에서는 희망이 올라온다. 희망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 고독의 시간을 누리며, 마침내 희망으로 나아간다.
훌륭한 작가나 혁명가 등의 신념에는 당대의 불평등에 맞서는 핵심 주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의 행동은 바로 고독 속에 벼린 힘이다. 세상은 정해진 질서 속에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일으켜 밀어붙일 때 흔들리며 나아갈 수 있다. 한 사회가 균형을 잃고 쏠려 있다면 기울어진 추를 중앙으로 가져오는 저항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저항은 시간을 두고 진단해가는 집요한 '사고의 고독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만진 것은 코끼리의 부분에 불과하니, 각자가 만진 부분을 교환하며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비교적 완전한 코끼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내 생각을 용감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뜻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개인들이 깊이 사고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하나의 답을 주고 토론하게 하고, 약자들에게는 그 한 가지 답만을 완성하도록 강요 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사고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아예 사회적인 습관으로 굳어져서 각 개인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 분위기에 젖어버린다. 그런 일상은 아주 위험하다. 남의 생각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혼자, 각자 생각해서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린 지금 시끄러운 일상에서 좀 이탈 해 고독이 필요한 때이고, 많은 이가 고독하게 앉아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힘을 길러내 어야 우리 사회가 성숙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떼 져서 다닌다. 카페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독은 스스로를 홀로 두며 스스로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각을 이루는 자리이다. 각자의 고독 속에서 반드시 스스로를 세워내는 존엄을 되찾고, ‘위대한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위대한 사회’가 된다고 나는 본다. 자기 존엄성을 가지면,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주인공으로 가장 나 답게 살 수 있다. 고독 속에서 나의 존엄성(la dignite)을 되찾자는 장쉰의 주장이 나는 반가웠다. 존엄성을 잃으면, 사람이 이상해 진다. 뭐, 우리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우린 '가오'로 사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고독할 줄 알아야 한다. 장쉰은 "지독하게 고독하라! 혁명과 변화는 그 순간 시작된다"고 말했다. 혁명과 변화는 마음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자기의 눈이 떠지는 그것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김수영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