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집단들이 정치를 통해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내야 한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각 집단들이 정치를 통해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장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과 연결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페.이스북의 내 담벼락에 4년 전 글이 <과거의 오늘>이라는 항목 속에 남아 있다. 그것들을 다시 읽고, 한 곳으로 모아두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질문의 답과 지혜를 얻는다. 오늘 아침 그 한 가지를 공유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의 이름이 여러 개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진보 혹은 보수 세력 지지자이기도 하고, 정당 당원이기도 하고, 지역 단체 회원이기도 하고, 경영자이면 경영자 집단, 노동자이면 노동조합 구성원이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다양한 결사체들이 시민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튼튼해 지고 건강하다. 그만큼 삶의 수준도 높아진다. 그러니까 어떤 결사체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거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집단들이 정치를 통해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장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과 연결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그렇지 않다. 또 한가지, 사는 일이 바빠서 결사체에 참여할 수 없으면, 후원으로 그 결사체를 지원해야 한다.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즉 확증편향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생각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당한' 생각을 실없이 반복하면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나는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좋아한다. 특정한 그릇에 갇히면 군자가 아니다. 군자라고 불리는 수준 높은 사람은 모든 일에 통하는 근본을 지키지 제한된 범위에서 움직이는 기능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소인비이불주(小人比而不周)"라는 말이 이어진다. "군자는 친하게 지내되 결탁하지 않고, 소인은 사리사욕을 위하여 결탁한다."는 말이다. 두루두루 남들과 친하면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기 라인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군자이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면서 편파적인 패거리를 찾지 않는다.
군자라고 불리는 시선이 높은 사람은 근본을 지켜서 널리 통하기 때문에 태도는 넓고 매우 공적이다. 그러나 사유의 수준이 낮은 소인은 기능적으로 같은 주장을 공유하는 자들끼리 뭉쳐서 패거리에 자신을 가둔다. 패거리는 공적이기 보다는 사적이다. 나는 군자가 아니라고 되는 대로 살고 싶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좀 더 성장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과 세상을 궁금해 하여야 한다. '우리'들끼리 공유하는 정해진 주장들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오는 데에 방해가 된다, '나'에게만 있는 호기심이 주도권을 잡아야 질문이 튀어 나온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나의 "기억"을 살피면,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녔어/ 그 푸르고 싱싱한 순간을/함부로 돌멩이처럼." 아침 사진은 비에 젖고 있는 능소화이다. 님이 그리워 담을 넘어 왔는데, 비가 내린다. 그래 나는 산책하다가 능소화를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그 소녀의 마음을 기억하려 한다.
기억/문정희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나는 젊지 않았어
때때로 날은 흐리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었지
짐 실은 소처럼 숨을 헐떡였어
그 무게의 이름이 삶이라는 것을 알 뿐
아침을 음악으로 열어 보아도
사냥꾼처럼 쫓고 쫓기다 하루가 가고
그 끝 어디에도 멧돼지도 없었어
생각하니 나를 낳은 건
어머니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어머니가 생명과 함께
알 수 없는 검은 씨앗을 주실 줄은 몰랐어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늘 펄펄 끓는 슬픔이 있었어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녔어
그 푸르고 싱싱한 순간을
함부로 돌멩이처럼
주말농장의 풀 뽑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풀을 낫으로 베기만 하지 잡초의 뿌리를 뽑지 않기로 했다. 농약은 당연히 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잡초의 뿌리는 땅에 숨구멍을 만들어 기르는 직물의 숨통을 열어주어 작물의 성장을 돕기 때문이다. 사람살이 에서도 숨통이 중요하고 그 숨통을 서로 열어주어야 한다. 그게 무엇일까? 소통이라 생각한다.
'욱'하거나 발끈하지 않아야 소통이 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이를 만나면, 팩트만, 본질만 이야기 하고, 많이 들으면서 계속 했던 말만 반복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내 생각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가급적 느낌은 말하지 않는다. 내 호인 "목계(木鷄), 나무 닭"처럼, 촤고의 싸움 닭은 뽐내지 않는다. 목계는 어깨의 힘을 빼고, 마음의 평화와 균형을 이루어 평상심으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안다. 그를 위해 공자 처럼, 나는 네 가지를 버리려 애를 쓴다. 의필고아(意必固我).
• 의 -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 즉 잡념
• 필 - 반드시 이러해야 된다는 기대, 새상 뜻대로 안 된다.
• 고 - 오랫동안 지니고 있으며 묵은 것을 굳게 지키는 고집을 버린다.
• 아 - 자신을 중시하는 아집으로 무아(無我), 즉 영어로 I'm nothing(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를 기억한다. 나를 버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나는 『화엄경』의 이 문장을 좋아한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나의 어느 것을 비워야 할까? 나는 늘 다음 세 가지 경계한다. 교만, 조급함 그리고 공격적인 태도의 사나움. 이 세 가지를 버리면 이런 것들을 대신 얻는다. 자기를 낮추며 겸손해 하며 세상의 눈높이와 함께 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실천이다. 다음은 조급함 대신 여유를 택하며, 움직이지 않기가 태산처럼 원칙을 지킨다. 이를 '부동여산(不動如山)의 여유'라 한다. 끝으로 공격적인 사나움 대신 부드러운 감성을 키운다.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러움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의 삶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뽐내고 잘난 척 하는 교만대신 자기를 낮추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며 겸손한 삶을 추구한다.
• 조급함 대신 여유롭고, 유연하지만, 어떤 움직이지 않는 원칙을 갖고 산다.
• 공격적인 사나움 대신 부드러운 감성을 키운다.
요즈음 가치의 혼란으로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게다가 진영의 논리에 따라 분열되어 확증 편향이 심화되고 있다. 아침마다 카톡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한 사건을 놓고 정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글을 쓴 사람을 평가하며 비웃곤 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라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경력이 다르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거나 주입하려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니까.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기분 좋은 일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반갑게 생각하고, 그와 음모(陰謀)를 꾸민다. 그래서 그런지 에피코로스는 우정이란 음모라고 말했나 보다. 음모의 시작은 공감에서 나온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면서 뭉클한 위로를 받을 때가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인문운동가로 나선 것은 슬픈 현실을 공감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소외시키는 여러 종류의 벽들을 허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 당분간 아침마다 소외의 반대인 소통에 대해 사유를 해보려 한다. 마침 몇일 전부터 노은에 있는 소소한 연구소에서 <인문학으로 마을에서 소통하기>를 강의하고 있다.
소통이란 말은 소외의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다. 소통이나 소외의 소자는 '벌어진 틈'이라는 의미이다. '소'의 뜻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꽉 막힌 것을 벌어지게 하여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견고한 조직이나 문화를 흔들려면, 우선 틈부터 내야 한다. 인문운동가는 그런 틈을 벌리는 사람이다.
소통과 소외는 서로 그 반대이다. 소외는 트임을 막는 것이라면, 소통은 트임이 뚫리는 것을 말한다. 소통과 소외는 그런 차이를 보인다. 이런 트임, 틈을 벌리는 데는 와인을 함께 마시는 일도 중요하다. 꼭 와인이 아니어도 된다. 어떤 술이면 다 된다. 술의 기능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이성에 틈을 주는 일이다.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한다. 사회적 가면을 벗게 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해본다.
소통이란 '소'를 극복(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말을 다 공감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운 것이다. 그래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는다. 오늘 아침 하고 싶은 말은 소통이라는 말에서 '통'에 방범을 찍기 보다 '소'에 찍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통이란 소외의 구조에 저항하며, 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의 뜻이 '틈이 벌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소외는 벌어지거나 벌어진 틈을 막는 것이고, 소통은 그 틈을 더 벌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통을 잘 하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우선 내가 망가져야 한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지 않은 채, 나만이 옳다며 자기 원칙만을 고집할 경우 애초부터 소통은 불가능해 진다. 그래 우리는 지금 어떤 소외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지 묻고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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