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천편일률 같은 색깔의 세상은 매력이 없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12. 09:07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천편일률 같은 색깔의 세상은 매력이 없다. 세상의 수많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각각의 다름이 모여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나는 꿈꾼다.

7월 둘째 주 일요일이다.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릴 일이지, 하늘만 어둡고, 날씨가 습해 짜증이 난다. 작년 7월 1일에 공유했던 아침 시를 다시 읽으며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소명 앞에/그 미세한 숨결 앞에 눈물로 떨리는 영혼//바람, 공기, 그리고 사랑, 사랑/무형의 얼굴로 현존하는 그것들은/때때로 묵시적인/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주말농장에 갔다. 붉은 토마토를 만나고 싶고, 7월의 노래를 실컷 듣고 싶었다.  

오늘도 매 일요일마다 만나는 짧지만 긴 여운의 글들을 공유한다. 인문운동가의 시선에 잡힌 인문정신을 고양시키는 문장들이다. 그리고 이런 글들은 책을 한 권 읽은 것과 갖다. 이것들은 나태하게 반복되는 깊은 잠에서 우리들을 깨어나도록 자극을 준다. 그리고 내 영혼에 물을 주며, 근육을 키워준다. 한 주간 모은 것들 중 몇 가지 공유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사진은 얼마 전에 주말농장에서 찍은 것이다. 아침 시는 짧지만 늘 긴 여운을 주는 서정춘 시인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그 흔적들이 남는다. 아무나 그렇지는 않다. 사진처럼, 달팽이처럼 살아 온 사람들만 그렇다. 지난 3년 전에 페이스북 담벼락에 내가 올린 앙드레 지드의 말이다. "당신 자체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 당신이 아닌 것이 당신인 척하며 사랑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달팽이 약전(略傳)/서정춘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 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 다 보인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 뿐인 生이 있었다.

1. "아끼는 것도 실력이다." MBC 김민식 PD의 글이다. "돈을 쓰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불행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언뜻 들어 오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대에 첫 직장을 그만둘 때나, 40대에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을 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한다. 돈 때문에 괴로움을 참고 살지는 않는다." "돈을 벌고 싶을 때 버는 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이 좋아야 돈이 벌린다. 돈을 쓰고 싶을 때 참는 게 진짜 실력이다. 운이 좋아 들어온 돈도 안 쓰고 모아야 늘어난다. 운 좋게 큰돈이 들어왔을 때, 소비 수준을 그에 맞춰 올려버리면, 나중에 고생한다. 돈을 버는 게 실력이 아니라, 아끼는 게 실력이다." 그러면 돈을 쓸 때 '멋지게' 잘 쓸 수 있고,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을 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2. 지금 세상이 거짓말처럼 트로트 열풍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이 열풍은 어딘가 수상하다.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와 생긴 본질적 흐름이 아니라 ‘음악의 예능화'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빨리 휘발될 위험이 크다. 이 열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괴롭다. 가사는 너무 뻔하고 퇴행적이어서, 어떤 건 듣기에도 민망하다. 멜로디엔 미학적 수고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편곡은 열 곡이 한 곡인 듯 기계적 패턴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교태 섞인 꺾기를 가창의 표준으로 삼아, 무대에서 품위를 밀어내 왔다. 그 결과 점잖은 주류 음악에서 밀려나 행사용 음악으로 전락했다. 어느 음악학자는 트로트의 미덕이 솔직함이라 했다. 솔직함은 삶을 대면하는 솔직한 태도여야 하지,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미학적 방기여선 안될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

지금의 성인 가요들은 그 책임을 방치한 채, 민망한 직설을 솔직함으로 포장하고 있다. 노래가 격조를 잃으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대중의 것이 된다. 좋은 노래 한 구절이 가슴에 오래 머물 때, 수용자 내면의 태도가 바뀌고 삶이 고양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삶의 이야기가 근사해 진다. 근사한(그럴듯하게 괜찮은)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삶이 근사해 야지 않나? 반대로 저급한 노래에 삶이 포위될 때, 삶의 감각 역시 볼품없이 쪼그라든다. 가수들은 행사용 자의식을 버리고, 그 옛날 좋은 선배들이 그랬듯 다시 음악가적 자의식들을 장착하기 바란다. 무대에서 객석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자신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몰입하는 순간들을 만나기 바란다. 그 순간 서민들의 애환은 아름답게 고양될 것이다.

3.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을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획일화된 교육보다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개성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더 활짝 피어난다. 다르면 좀 어때? 달라서 틀린 것이 아니고 달라서 멋진 것이 될 수 있다." (오금아)

천편일률 같은 색깔의 세상은 매력이 없다. 세상의 수많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각각의 다름이 모여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나는 꿈꾼다. 그러려면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고, 단지 차이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4. 집에 내추럴 와인 한 병이 있다는 것은 와인이 온 땅과 그 해의 비바람, 그 풍경을 병 속에 봉인해둔 것과 같다. 내추럴 와인은 기본적으로 유기농 과일을 손으로 수확해서 착즙한 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필터링이나 살균을 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칭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이다. 인간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제조하는 것이 아닌 자연이 준 그대로의 과일을 발효해서 만든 것이다. (신이현, 작가)

좋은 와인이나 음식은 과일이나 식자제가 자란 땅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셨을 때 ‘이건 너무너무 맛있다’는 평가는 입맛에 따라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실제로 그 맛있는 술에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많은 트릭을 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음식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얼마나 맛있는가’보다는 얼마나 내추럴한가, 얼마나 신선하고 살아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음식 또한 입에 짝 붙는 맛보다 재료 본연의 특징을 살리려고 애쓰는 요리사가 더 좋다. 주말 농장에 사서 직접 재배한 토마토를 먹으며 그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사는 것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5. 두 대화를 들어 본다.
- "네발짐승은 아주 판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걷습니다. 측대보(側對步)와 대각보(對角步)가 그것이죠. 측대보는 오른쪽 앞발과 오른쪽 뒷발이 동시에 나가는 방식이고, 대각보는 오른쪽 앞발과 왼쪽 뒷발이 함께 나가는 방식이죠.” 내심 놀란 그가 “저 암소들은 대각보로 걷고 있군요”라고 말하자 그 기자가 말을 이었다.
- “아직 동물학자들이 다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끼입니다만, 개나 소 같은 가축은 대부분 대각보로 걷습니다. 반면에 야생의 네발짐승은 측대보밖에 몰라요. 가축의 걸음걸이를 측대보에서 대각보로 바꿔놓은 것은 인간의 존재, 어떤 문명효과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고두현 시인이자 논설위원의 칼럼이다. 이 대화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와 한 기자 사이의 대화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셸 투르니에는 통찰력과 유머를 겸비한 작가다. 2016년 타계할 때까지 성찰적 지식과 미학적 감성으로 세상을 그렸다. 파리 근교에 살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미국 기자가 찾아왔다. 기차역까지 차로 마중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둘은 암소 떼를 만났다. 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 그는 네발짐승을 유심히 살폈다. 새로운 관찰은 새로운 통찰로 이어졌다. 그래 관찰이 중요하다.

그의 관찰 결과 이상적인 걸음걸이는 역시 '대각보'였다. 코끼리나 낙타처럼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다른 쪽으로 기울이며 뒤뚱거리는 '측대보' 보다 '대각보'가 더 균형 잡힌 걸음걸이였다. 그는 이 같은 성찰의 결과를 ‘측대보와 대각보’라는 에세이로 써서 산문집 《예찬》에 실었다.

그는 에세이에서 “땅바닥이 고른 평지에서는 대각보로 걷는 것이 유리하고, 울퉁불퉁하거나 바위가 많은 경사지에서는 측대보가 낫다”며 “측대보는 야생의 걸음걸이요 대각보는 문명의 걸음걸이”라고 표현했다. 거칠고 야만적인 행동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는다. 최근 우리 사회를 격랑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정치적 행태도 그렇다. 이념에 사로잡혀 상대 진영을 사냥꾼처럼 몰아붙이고, 정제되지 않은 거친 주장을 경쟁적으로 내뱉고 있다.

이렇게 한쪽으로 쏠리고 뒤뚱거리는 ‘측대보 정치’의 결과는 ‘말’이 아니라 ‘돌’이 되어 돌아오기 쉽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명은 화가 난 사람이 ‘돌’을 던지는 대신 최초로 한마디 ‘말’을 하는 순간에 시작됐다.” 인간과 함께 평지에 사는 가축은 양쪽 발 교차하는 '대각보' 걸음인데, 산비탈 사냥하는 야생동물은 한쪽 발 동시에 내딛는 '측대보' 걸음이다. 대각보 걸음처럼, 완급을 조절하고 균형 찾는 게 문명화이다. 이제 '생각의 걸음새'도 함께 돌아봐야 한다. (고두현)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기렸다가 하여야 한다. 아니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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