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일반삼(擧一反三): 하나를 알려주면 나머지 셋을 안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알고 있는 것, 앎 또는 지식이 '나'이다. 그것은 내 삶의 방식이고,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지식은 내 삶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게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앎은 기억의 기능이나 마음 속에 저장된 수많은 정보의 총체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그리고 앎, 알아차림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앎'은 저장된 수많은 정보를 분류하고 추려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 주는 여과기이다." 어렵다. 좀 각도를 달리해서 말해본다.
김정운 교수에 의하면, 생각은 지식-정보-자극이라는 삼각 편대로 이루어진다. 지식(knowledge)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일 뿐이다. 새로운 지식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면, 이제까지 형성된 지식 이외의 것을 습득해야 한다. 정보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극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지각한 자극들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이란 말이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자극을 정보라고 부른다. 문제는 정보는 혼자서 해석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정보와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그러니 좀 알려고 해야 한다. 남이 하는 말만 받아들이면 실수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관자, 즉 관중의 정책과 지혜를 담아 쓴 책인 『관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운 바를 극진히 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소수시극(所受是極)'이라 한다. 그 다음은 배운 지식 그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지식과 삶이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또한 그걸 글로 쓰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배운 것을 글로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거일반삼(擧一反三), 하나를 알려주면 나머지 셋을 안다"는 말을 했다. 하나를 배워 셋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배운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지혜, 통찰력으로 깨어나야 한다. 그게 공부하는 자세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 본다. 우선 내가 변해야 한다. 변화하려면, 정보를 습득해서 그걸 내 것으로 만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를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이다. 이를 풀어 보면, information(정보)→in(안) + formation(형성)→transformation(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정보를 안으로 형성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학습(學習)이다. 이 말에서 습(習)이란 "어린 새가 날개를 퍼드덕거려 스스로 날기를 연습한다"이다. 그것도 100번 이상 연습한다는 것이다. '學'이 정보 습득이라면, '習'은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공부'라고도 한다.
그래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고, 그 사실을 오랜 경험과 습(習)을 통해 몸과 정신으로 아는 지식이 있다. 이를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그노시스'라 했다. 이 '그노시스'는 씨앗과 같다. 씨앗은 모든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일상에서의 수련은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이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행위이다. 농부가 과실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하는 일들과 같다. 땅에 심을 알맞은 품종을 정하는 혜안과 시기 적절하게 씨를 뿌리고, 지연의 섭리대로 발아하기를 기다리는 인내와 같다. 씨앗은 가능성이다. 내 안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이 일상의 수련이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자에겐 열매를 맺는 과실나무이며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느티나무이며 동물들이 뛰놀 수 있는 숲이다."(배철현) 동의한다. 내 씨앗은 어떤 가능성일까? 나에게 매일 매일의 글쓰기는, 깊은 심연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삶에 가장 어울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요가를 하는 것처럼.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오늘"을 살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 내 만트라이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났는데 불현듯 제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는다. 가끔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오늘/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씨앗 이야기를 이어간다. 천국을 씨앗과 비교하는 복음서들을 베교수로부터 소개받고 읽어 보았다. "천국은 모든 종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 만일 그 씨가 준비된 토양에 떨어지면, 그것은 많은 풀을 내어 하늘의 새들이 쉼터가 될 것이다."
예수는 또 천국을 겨자씨라고 말한다. 겨자씨는 유대인들이 키우기를 꺼려 할 정도로 주변의 풀들을 잡초로 만들어버리는 유해한 식물이다. 이를 오늘 날의 말로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악성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겨자씨처럼, 미미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정원의 잡초처럼 보 잘 것 없는 존재였다가 곧 널리 퍼져 나가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을 잡초로 만든다. 사람들이 잡초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잡초는 더 빨리 퍼져 나간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자기 혁명은 겨자씨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이 천국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천국을 경험한 자가 아니다. "겨자씨는 어떤 것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버려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 13:31)
인간이 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인간의 본능과 구별되는 '생명을 주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혼이 '씨앗을 품은 이성'이다. 멋진 표현이다. 내 안의 이 씨앗을 지키는 것이 "영혼을 최선의 상태"(이리스토텔레스)로 유지하는 일인 것 같다. 인간은 이 씨앗을 통해, 육체와 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은 이 씨앗을 통해 신적인 로고스와 소통한다. 여기서 로고스는 삼라만상을 작동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이성이자 우주의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움직이는 신 혹은 자연의 우주 작동 원리이다.
씨앗 같은 지식을 얻는 공부는 자신의 삶을 위한 최적의 씨앗을 선별하고 그 씨앗을 자신의 삶이라는 토양에 깊이 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이다. 공부에서 제일 우선해야 할 것이 품종을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주변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자신에게 하나뿐인 고유한 삶의 씨앗을 결정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고유한 나무가 되기 위해, 최고의 품종을 선택하기 숙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이에 의해 강요된 씨앗을 선택하는 행위를 우리는 무식, 또는 무지라고 한다. 그 땅에 어울리는 씨앗을 아는 능력이 앎, 알아차림이다. 그건 단순하게 습득한 지식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경험이 낳은 자식이다.
오늘은 내가 새벽에 심은 생각이라는 씨앗이다. 그 오늘이 모여 우리들의 인생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인생이라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오늘은 자신에게 알맞은 품종을 선택하고 그 씨앗이 발아하도록 인내하면서 가꿀 뿐이다. 최선의 삶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은 일상(日常)이다. 내가 그 일상을 응시해 최선을 발견한다면, 그 일상은 특별한 일상인 비상(非常)이 된다. 만일 내가 그 일상을 방치하거나 흘려 보내면, 그 일상은 진부(陳腐)가 된다.
배철현 교수는 "인생이란 우리가 될 수 있고 그래서 되어야만 하는 그것을 성취하려는 마라톤 경주다"라면서, "인생이란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정한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며, 그 지점을 위해 매일 매일 자신이 행하고 있는 방향을 점검하고, 오늘이란 시간에 마쳐야 할 구간을 정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목표지점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무식하며, 어렴풋이 발견하였지만,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게으름)하고, 남들이 좋다는 경로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했다.
오늘을 어떻게 살까? 에픽테토스의 <인생수첩>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나침방으로 삼는다. "세상에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조절(調節)이란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상황을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지혜(智慧)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자신의 정성을 몰입하는 것이 현명(賢明)이다.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은 무역상을 하다가 몰락하여 빈털터리가 된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의연한 몸가짐과 자신 조차도 존경하는 숭고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외부의 야유와 불행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의 불행을 자신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불쏘시개로 전환시켰다. 제논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여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듣고 철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후에 당시 유행하던 견유학파의 회의주의 철학을 넘어선, 우주적 자아로서의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의무를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제논의 힘은 조난사고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하루의 거룩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가 중요하다. 태도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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