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22. 10:02

7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 voyant)'라 한다. 한국의 시인 중에 가장 잘 관찰하고, 잘 묘사하는 시인의 <멸치>을 알게 되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그 차이를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우리의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 준다. 오늘은 좋은 날인지, 저녁 약속이 4개나 겹친다.

멸치/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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