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에 가면 저마다 죽은 이유들이 다르게 존재한다.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에 공유할 시를 고르다가, 생각이 '자기기만(自己欺瞞)'이라는 말에 빠졌다. '자기기만'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그래 두 개의 질문을 해 보았다. (1) 우리는 어떤 근거로 자신의 마음을 결정할까? 세상 모든 결정에는 저마다 타당한 이유가 함께 한다. 그만큼 인간은 훌륭한 '이야기 꾼'이다. 공동묘지에 가면 저마다 죽은 이유들이 다르게 존재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한다. (2) 우리가 내린 결정이 옳은 선택일까? 이것 또한 다른 문제이다. 아니면 누군가의 기만에 빠져서, 혹은 자기기만에 걸려서 '올무'가 되는 일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는 항상 기만과 자기기만의 덫이 놓여 있다. 이 기만은 타인을 배척하는 데도 작동하여, 진영 논리의 골이 깊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 분야의 책으로는 로버트 트리버스의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이한음역, 살림, 2013)라는 책이 있다. 그는 진화생물학자의 눈으로 속임수(기만欺瞞)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이 책에서 잘 분석하고 있다. 타인을 속이거나, 또는 자신을 속이는 우리들은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고 이용당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다. 우리 안에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고 치면, 의식이 모르도록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편집하는 거다. 그러면 진실한 정보는 무의식에 저장되고, 의식에는 거짓이 남는다.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선택해서 기억한다. 이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사용되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타인을 기만하는 데 보호막을 더 견고하게 구축하기도 한다.
자기기만과 자기 확신은 다르다. 사회가 경직될수록, 조직도 마찬가지로 경직될수록 복지부동(伏地不動,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의 모습이 강하다.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자기 주도로 업무를 처리해 나가기보다는 명령을 기다린다. 그래서 현명한 지도자는 자기 성찰을 하며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기 신념보다는 정보나 전문가에게 귀 기울이어야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사회의 상층에서 더 자기기만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상층에 있을수록 자기기만에 빠진다는 것은 권력을 투사하여 자신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최상층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스스로 유능하다는 자부심을 느끼므로 자신이 내리는 판단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며 공정하다고 스스로에게 투사한다. 자기기만의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우두머리가 위계 질서를 중시하는 권위적 성향이라면 구성원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확률은 더 높다. 왜냐하면 자기기만에 빠지면 자기 확신이 과해지기 때문이다.
자기과신, 상대를 얕잡아 보는 자세, 인종 차별적인 관점 모두 현인류로 진화해오는 모든 과정에서 빚어진 갈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맛보곤 했다. 예컨대, “메신저를 쏴라”라는 말은 메신저가 나쁜 뉴스를 갖고 돌아오면 그 메신저를 죽이는 것이다. 나쁜 상황을 살피기보다 그 정보를 가져온 사람을 탓하는 지휘관의 기만적인 행위를 뜻한다.
집단의 자기기만을 막는 일도 개인이 삶 속에서 기만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만과 자기기만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타인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잠시 멈춘다. 다른 모든 일을 멈추고, 인터넷도 끄고, 그 일에 관한 목록을 작성하고 명상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 더욱 침착해지고 타인에게 덜 냉정하도록 기도할 수 있다.
자기기만을 피하는 길이 그저 잠시 앉아 살피는 일인데도, 우리는 떠밀려 살아온 관성을 제어할 용기를 못 내고 있다. 기만이라는 덫에 걸리는 사냥감은 대개 탐욕일 경우가 많다. 나의 탐욕과 집단의 탐욕을 바라보고, 해체하고,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새우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시간처럼 인간도 진정한 어른으로 탈피하는 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제 속 채우느라 애쓸 뿐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고등어는 속 비고 나니 돌아와 제 아낙 안고, 평생 애 끓던 아낙도 속 덜어 내고서야 굽은 등 편히 맡긴다. 죽기 전에 속을 비울 수는 없을까? I'm nothing(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이라고 하면,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일 일 없을 것이라고 믿든 아침이다.
간고등어/이언주
어물전 한 편에 짝지어 누운
한물간 고등어
속 다 덜어내고 상처에
굵은 소금 한 줌 뿌려
서로의 고통 끌어안고 있다
무슨 연으로 먼 바다를 떠돌다
한 생이 끝나도록 저렇게 누웠을까
지아비 품 크게 벌려
아낙의 푸르딩딩한 등짝 안고,
빈 가슴으로 파고든 아낙
짭조름하게 삭아 간다
남세스러운 줄도 모르고
대낮부터 포개고 누워있는 저
부부
눈도 깜박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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