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깨달은 사람의 삶은 오늘만 산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16. 10:25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김영식이라는 분의 페북 담벼락을 읽다가 긴 시간을 보냈다. 생각은 있었지만, 그걸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다가, 내 마음을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내 생각을 잘 표현하는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 글들을 읽고 아침에 얻은 통찰들을 정리했다. 이런 식이다.

내 만트라는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이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났는데 불현듯 제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는다. 가끔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깨달은 사람의 삶은 오늘만 산다. 그리고 지금-여기만 산다. 이 사실을 소환하는 수준에 따라 그 강렬함의 차이가 나온다. 어떤 이는 수동적으로 연기론에 따른 인연을 따르지만,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인연을 창조하는 힘을 쓰기도 한다. 이렇듯 한 생각을 바꾸면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습관이 생겨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혼돈 없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애써 마음의 에너지를 짜서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도 써 보았다.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겪으며 현상들 간의 관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 때 '체득되는 진리'는 일어나는 현상의 부정으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바른 부정이다. '바른' 부정은 한 단계의 전제가 완전히 달성되었기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반동이다. 완성되지 않는 전제를 부정하면, 그 부정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내려놓기 위해서는 완전하게 쥐어야 하고, 완전하게 내려놓아야 다시 바르게 쥐어 쓰는 법을 알게 되며, 질적 비약을 이룬다. 이런 식으로 진리는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므로 어디에서도 결코 머무르지 않지만, 어떤 과정도 대충 넘어가거나 생략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며 머무를 곳도 없으며, 머무를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도 대충 넘어가거나 생략하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이게 진리이다. 한 단계가 이루어지면, 머무르지 말고 건너가야 하는 이유이다. 그 건너가기는 전 단계의 완전한 부정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쥘 때'와 '펼 때'를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의 원 주민 들은 원숭이를 사로 잡는 기막힌 기법을 알고 있다. 나무 밑둥에다 손이 간신이 들어갈 정도로 작은 구멍을 파고, 그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땅콩이나, 밤 등을 넣어 두는것이 원숭이 생포 작전의 전부라 한다.

냄새를 맡은 원숭이는 슬그머니 다가가 구멍속에 손을 집어 넣고는 그 속에 든 먹이를 한웅큼 쥐지만, 손을 웅켜진 상태에서는 구멍에서 손을 빼 낼 수가 없다.  손을 펴서 먹을 음식을 포기하기만 하면 쉽게 구멍에서 손을 빼낼 수가 있어 잡히지 않을 것이지만, 원숭이는 그걸 포기하지 않고 쩔쩔 매다가 그만 자신의 몸 전체를 인간에게 헌납하고 마는 것이다.

"쥘"줄만 알고"펼줄"을 몰라 자기 욕심의 회생양이 되는 것이 어디 원숭이 뿐일까? 세상사의 모든 비극이 쥘때와 펼때를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뻔한 것 같지만,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양 것 벌어도 먹는 것은 세끼요, 실컷 살아 봐도 백 년은 꿈인 것을, 못 산다고 슬퍼말고 못산다고  비관말라! 재물이 늘어 나면 근심 걱정도 늘어 나고, 직위가 높아 지면 외로움도 늘어나는 법이다. 부자 중에 제일은 마음 편한 부자이고, 자리 중에 제일은 마음 비운 자리이다.

생각에 대한 글도 만났다. 생각(의 내용)은 경험과 기억의 저장고에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으로 실재할 수 없다. 생각은 현상이지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생각을 꺼내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경험과 기억의 저장고에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머릿속 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각이 실재한다고 착각하고는 이 멀쩡한 세계에 생각의 투명랩을 씌워 세셰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내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우주(생각)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화론적으로 봐서 사람이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지혜로운가? 생각이 생각임을 알고 생각 세계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걸 다시 말하면, 생각이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 생각이라는 현상에 낚이지 않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그냥 단순한 탈속이나 방탕하고는 다른 이야기이다. 생각에 의해 왜곡된 세계와 있는 그대로를 비춰내는 세계, 이 두 세계가 있음을 알고 생각 세계에 드나들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한다.

그래 오늘 아침은 이근화 시인의 "대파에 대한 나의 이해"라는 시를 공유한다. 시인들의 생각은 엉뚱하다. 눈앞에 대파를 놓고도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파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아니고, "굵고 파랗"고, "단단하고 하얗"고, "맵고 끈적끈적하"고, 씹으면 "미끈거리고 아"린 것, 그런 게 대파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대파를 이해해 온 상식적인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일 수도 있다. 아침에 생각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대파'를 '가까이 알고 지내는 누군가'로 바꿔 놓고 이 시를 곰곰이 읽어 보자,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 왔는가? 내가 그들을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다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다짐한다. 생각에 의해 왜곡된 세계와 있는 그대로를 비춰내는 세계, 이 두 세계가 있음을 늘 의식한다는 말이다.

대파에 대한 나의 이해/이근화

대파를 샀다.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있었지만 대파를 샀다. 굵고 파랗다. 단단하고 하얗다. 맵고 끈적끈적하다. 대파다. 흙을 털고 씻었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큰 칼을 들고 대파를 썰 차례다. 억울하면 슬픈 일을 생각하면 좋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대파니까. 시장바구니에 삐죽 솟아오른 것이 대파였다. 설렁탕도 골뱅이도 없이 대파를 씹는다. 미끈거리고 아리다.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대파여서 뿌듯하다. 종아리 같은 대파였으니까. 파밭의 푸른 기둥이었으니까. 뿌리를 화분에 심으면 솟아오르는 대파니까. 허공에 칼처럼 한번 휘둘렀으니까. 대파하고. 파꽃이 피고 지면 알게 될까. 대파를. 뜨거운 찌개에 올려 숨죽인 대파의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까. 대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은 일찍 갑사에 있는 <유라시아 예술 문화원>에 간다. 새로운 도전이다. 유라시아(Eurasia)는 유럽과 아시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세계 전 육지의 40%를 차지하는 최대의 대륙이다. 우랄 산맥과 캅카스 산맥 등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양 대륙을 하나로 간주하자는 의미에서 유라시아란 이름을 나는 좋아한다.

오랜 만에 오는 길에 갑사를 산책했다. 대학 시절에 주 무대였는데…… 오랜만에 갔다. 맑은 새 소리가 내 발걸음 잡았다. 그걸 공유한다. 소리를 높여 계룡산의 기운을 공유하고 싶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이근화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