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9. 16:50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9일)

어제 공유한, 팔복 3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제1복: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그리고 지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헤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 제2복: 슬프면 슬퍼하라. 아픔이나 고통을 피하지 마라.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일상에서 일어나 생로병사에 두려워 마라.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다.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 한다.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고, 힘을 얻는다. 그래 사람들은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 제3복: 온유 하라. 성격, 태도가 부드러운 거다. 그 말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거다. 내려놓음에서 나온다. 그건 나를 비우고 도에 맡기는 거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팔복(八福, beatitude)" 중 나머지 다섯 가지 "복"이야기를 공유한다. 이 것은 <마태복음>  5장 3-7절에 나오는 거룩한 말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의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주님의 기도(주 기도문)'와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다들 고민한다. 예수가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진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8가지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관념적이거나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구체적인 강령(綱領)이다.

오늘 살펴볼, 산상수훈의 '팔복'중 4-8복은 맹자가 말한 '4단(端)+1=5행'으로 바꿔 볼 수 있다. 제4복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라는 거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righteousness'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다. 아브라함에겐 '네 양심에 충실 했느냐 였다. 모세 때에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 가, 아닌 가의 기준이었다. 십계명의 알맹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선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제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가 '사랑'으로 뒤집었다. 예수는 의로움의 기준을 '사랑'으로 제시하셨다. 사랑이 깔린 의로움은 '격'이 달라진다. 어떻게?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상대장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사랑이 담긴 정의이다. <<무지개 원리>>를 쓰신 고 차동엽 신부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안중근 의사(義士)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 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 거다. 그에게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사랑이 밑바탕이 된 정의이다.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정의를 편에서 분노할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정의이다. 사랑이 있는 정의이다. 더 큰 불의를 막기 위해.

사랑의 마음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다. 이런 것이 없다면, 바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성의 시작(인격, 人格)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또 다음의 4가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다.

▪ 정의로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그런 일을 했다면 수치심을 갖고 창피해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한 자신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지나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정의가 아니다.
▪ 예절이 있어야 한다. 겸손과 배려의 마음이다. 예절을 몸에 익혀야 한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을 만들어 준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 쉽다. 지혜로워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속마음으로는 자명한 것과 찜찜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 진리를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한다. 진리에 입각한 옳은 판단을 하는 힘이 지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을 잘 관찰하고, 침묵으로 말하는 자연 속에서 그 진리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지연이 보여주는 진리와 지혜는 같다고 본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 이러한 마음을 일시적으로만 갖는 것이 아니라, 늘 성실하게 마음 속에 지니고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그것이 사람들이 자신을 믿게 하는 '믿을 신(信)'이다.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박해를 받더라도 믿음을 갖고 의로운 일을 하면 하늘이 알아줄 것이다.

'사랑'과 '정의'가 인간 본성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리면, 정의, 아니 의로움은 하나의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욕망과 이익 문제로 단순화하곤 한다. 한번쯤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혹은 ‘내가 모르는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좋겠지만, 자신만의 정의가 앞서면 그만큼 깊은 확신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내가 옳고, 이 일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량하게 무례할 수 있다. 의로움, 정의는 간단히 말하면,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상대방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제5복: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는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상대방의 마음과 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평생 구원 활동을 하신 동기도 자비심 때문이다. 고 차동엽 신부는 좋은 예로 자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 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들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그게 바로 아이가 건넨 자비였다." 신영복 서화집에서 보았던 문구가 생각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왜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게 되는가?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늘에서 더 큰 자비가 쏟아진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성경 구절처럼,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비가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에 대한 용서가 되고,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된다."  그러니까 자비를 일상 생활 속에 실천하려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이런 일화 하나가 기억난다. "나는 학교에서 몸담고 있어 자선을 베풀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운전을 할 때라도 자선을 하자는 생각으로 계속 양보 운전을 한다." 생각해 보면, 일상 생활 속에서 자선은 간단하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한 강연을 통해 종교의 자비로움을 끌어내고 실천해야 한다면서 “자비로운 마음은 스스로 돌아보아 개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준 고통을 발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같은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종교적 명상과 신앙심이 이러한 곳까지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제6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서 '깨끗함'의 그리스어가 '카타로스(Katharos)'이다. 이 말의 뜻은 '잡티가 없는 순수함'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타르시스(Katarsis)'의 어원과 같다. 이 말은 '씻겨 냄' 뒤에 오는 것이다. 예컨대, 눈물이란 한번 울고 나면 상황을 잊게 하는 모르핀 같은 것이다. 울고 나면 시원해지는 그 감정을 '카타르시스'라는 그리스어로 명명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카타르시스는 '정화(淨化)'를 뜻하는 말로 그의 『시학』에 나오는 말이다. 비극을 보면 흘리는 눈물이 마음을 순화해 평정심을 가지게 한다는 뜻이다.

'카타로스'도 마찬가지이다. 눈물로 씻어내고, 다시 말하면 회개로 씻어내는 거다. 고 차동엽 신부는,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을 씻는다. 그렇게 씻어낸 뒤 마음이 깨끗해 지는 거"라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쁘다 하더라도 "씻어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차 신부는 이탈리아의 영성가인 카를로 카레토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침묵과 기도를 하라. 그렇게 영혼을 재건하기 위한 고독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성 생활이다." 그래야 '깨끗한 사람'이 된다.

그럼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말에서 정말 하느님을 보는 것인가? 차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하느님과 통(通)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3차원적인 언어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느님을 봤다' 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봤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통(通)함'의 의미가 된다."

어제는 동네 근처에 있는 대덕대학에서 와인아카데미 제1기 강의를 시작했다. 9분이 오셨는데, 다들 좋으셨다. 그리고 루마니아 와인 공동구매를 제안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이외로 구매해 주셨다. 모두 다 감사한 일이다. 콧노래가 나오는 아침이다. 오늘도 "팔복"을 생각하고, "바람이 전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충만한 하루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마음을 씻었다.

바람이 전하는 말/최서림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몸 안에 공기 주머니를 차고 방울새로  살라 하네.
부딪히지 말고 돌아서 가는 물로  살라 하네.
위벽을 할퀴고 쥐어짜듯 아픈 새벽
유리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일러주는 말,
비우면 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니 강물처럼 살라 하네.
물새 똥 앉은 조약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살라 하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최서림 #정의와사랑 #산상수훈_팔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