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 사회를 통합하기 보다는 분열로 모는 세력들이 수구 언론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14. 08:49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조중동 기자들이 '정의연' 활동가들을 닦달하는 방식은 이미 전에 어디서 본 듯 하다.

우리 사회를 통합하기 보다는 분열로 모는 세력들이 수구 언론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정의연'이라는 짤막한 시민 단체에게 그 세력들이 포화를 던지고 있다. '정의연'의 공식 명칭을 아는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다. 이걸 줄여, '정의연'이라고 말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사실 나도 '정의연'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나는 전우용 역사학자가 다음과 같이 했던 말에서 분노했다. "기부금 거둬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건, 일본 극우와 아베 정권, 토착 왜구들의 일관된 목표입니다." 다른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조중동 기자들이 '정의연' 활동가들을 닦달하는 방식은 이미 전에 어디서 본 듯 하다. 이를 우리는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로 데자뷔)'이라 한다.  최근에 검찰과 수구 언론들은 시민들의 검찰 개혁 바람을 꺾기 위해 전 법무부 장관 조국 일가의 모든 생애를 탈탈 털어 온갖 혐의를 들추어내고, 그것들을 기정사실인 양 유포했던 사건을 다시 보는듯 하다. 전우용 역사학자는 또 다른 예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1907년 겨울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자, 일제는 수납 처였던 매한매일신보사 간부들이 의연금을 유용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한국인들의 '애국심'을 꺾어 버리고, 대한매일신보사 문을 닫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대한매일신보사 간부들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운동의 열기는 식어버린 다음이었다고 한다.

왜 수구 언론들은' 정의연'을 어떻게든지 흠을 내려는 것일까? 도덕적이지 않다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보통의 생활인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도덕하다고 욕하고 물어뜯는 자들의 의도와 도덕성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우리는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내 생각으로는, 틀릴지 모르지만,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반민족 행위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줄이고, 정의연을 무력화하려는 것이 아닐까?

왜 아침에 이런 불쾌한 이야기를 하는가? 인문운동가는 단순한 힐링 인문학으로 지친 대중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필링(peeling) 인문학으로 세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슬픈' 의도의 껍질을 벗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앞장 서서 '욕하고 때리는 자'들의 의도와 도덕성에 경각심을 갖지 못하면, 인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사소한 문제로 트집잡아 경비원을 때리고 욕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불의(不義)의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면, 생각을 당한다. 그래 나는, 인문운동가로서, 좋은 아침에 고발한다.

오늘은 코로나-19 이후로 첫 대중 강의를 간다. 생각이 많은 아침이다. 사진은 우리 동네 경찰 지구대의 마당에 핀 분꽃을 찍은 것이다. 마음속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으면 꽃을 봐도 건성이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이다. 꽃만 보면 사진을 찍는다. 딸이 그런다. "꽃 사진 찍기 시작하면 나이를 먹은 거래." 나도 나이를 먹은 거다. 꽃이 좋다. 길의 모든 꽃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덜 복잡하기 때문일 거다. 난 몇 해전부터 마음을 비우고 살고 있다.

조용헌의 글이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지만,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르구나.' 이 구절에서 '사람은 다르구나'가 의미가 깊다. 우선 사람이 늙어 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몸의 컨디션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인간은 서글퍼진다. 그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꽃은 왜 작년이나 올해나 그 빛깔과 이파리가 똑같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이 나오게 되어 있다. 꽃의 아름다움과 육신의 늙어감이 대비된다. 이 대비에서 인간은 종교적 순응의 마음을 터득하는 것 같다. 순응해야지 어쩌겠는가. 춘하추동의 순환과 생로병사의 변화를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운명에 거역하면 질질 끌려가지만 순응하면 업혀간다는 말도 있다. 기왕 갈 바에는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서 가는 게 좋다. 순응과 받아들임. 이것이 나이 들어 가는 미덕이고 사람이 익어간다는 징표라고 생각된다. 나는 주름살이 늘어 가는데 꽃 너는 왜 그렇게 해마다 싱싱한 것이냐 하는 물음도 결국 인간의 욕심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주관적 관점으로 철리(哲理)를 비틀어 보는 셈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물구나무서서 보다/정희성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집 없는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
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
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
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 사람들한테 쫓겨 가자 지구로 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년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난감 총을 들고 전사의 꿈을 키우고 잇고
아마 머지않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
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
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아침은 아직 끝내지 못한  한근태의 『고수들의 질문법』 이야기를 이어간다.  질문을 하는 습관을 각기 위해 며칠동안 질문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질문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토대를 단단히 하고 새로운 오르막길을 향해 한 발을 내닫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질문은 우리를 진정한 고수로 성장시키에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나는 어떻게 살까'라며 삶의 목적을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질문은 목적을 위해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질문은 자동차의 네비게이션과 같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목적지 설정을 하지 않고 운전을 하는 것과 같다. 질문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릭 워런(Rick Warren)은 『목적이 있는 삶』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지만, 반대로 삶에 의미가 없다면 어떤 것도 참을 수 없다."

이 문장의 키워드 세 개이다. 하나는 건강, 두번째는 성장, 세번째는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기여하는 삶이다. 오늘 아침은 책의 내용에 따라, 두 번째 성장을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저자는 '발전의 단계'란 말을 썼지만, 그보다 나는 성숙이란 말로 바꾸고 싶다. 저자의 주장에 따라, '인간 성숙 단계'를 나도, 그처럼, '지식견해', 즉 '지(知)·식(識)·견(見)·해(解)'로 표현하고 싶다.
▪ 지(知) 단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표현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식(識) 단계: 여기서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 없다. 그런데 글은 아무나 쓸 수 없다. 먼저 아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고 싶은 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대강 정리가 된 생각은 글을 쓰면서 개념이 점차 확실해 진다.
▪ 견(見) 단계: 볼 견이지만, 의견(意見)의 견이다. 자신의 의견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의견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배움의 결과로 얻어지는 식견(識見)이라는 말도 있다. 지식이 있어야 견해가 생긴다. 지식이 없는 의견은 자기 만의 의견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자기 의견이 있어야 독립적이고 주체적이 된다.
▪ 해(解)의 단계: 문제를 푼다는 말이다. 성숙의 가장 큰 성과는 문제 해결 능력의 향상이다. 배우고 공부하면 복잡한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세상의 어떤 문제라도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보면, 소설의 세계 안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뭐냐 하면? '생각하면 안 되고, 일기를 쓰면 안 되고, 표현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언어의 제한이 많다. 표현을 금지하면 사람들을 쉽게 바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삶을 성장시키는 길은 그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지식견해'를 통해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즉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글로 써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름의 자기 의견을 만들고, 해법을 다양하게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을까? (1) 너무 오랫동안 질문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인간들의 꼬리뼈처럼, 질문 근육이 쇠퇴한다. (2) 질문했다가 무식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오해를 받아도 자꾸 질문해야 실력이 는다. (3)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도 뭘 알아야 한다. (4)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다르다. 질문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자성어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마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를 '수치불문(羞恥不問, 모르면서 묻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마라)'으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이것도 훌륭한 사자성어이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학교 강의와 달리 성인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듣는 청중들에게 필요한 강의라고 한다. 나도 성인을 상대로 특강을 많이 하는데, 성인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래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보다 청중들의 니즈를 알기 위해 강의 초반에 다양한 질문을 던진 뒤,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이 좋다. 강의 후에도 쉽지는 않지만 활발한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직장인들은 싫어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과 원하는 것은 다르다.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싫어하는 것으로는 변화할 수도 없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쉽지 않지만, 싫어하는 것이 아닌,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때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해 본다. 질문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질문이 생긴다. 질문을 할 수 있으면 답을 얻을 수 있고, 답을 얻을 수 있으면 그런 삶을 우리는 살 수 있다. 질문이 중요한 이유이다. 원하는 걸 확실히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럼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럼 무엇을 원할까? 영어로 원하는 것을 우리는 want'라고 한다. 나는 아주대 김경일 심리학 교수한테 배운 게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want'를 만들어 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영어로 'like'라고 한다. 김교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like)'은 없는데, 그저 사회적으로 원하는 것(want)'을 추구하며, 행복해 하지 못한다. 그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원하는 걸 계속 추구하다 보면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찔러야 되고, 더 많이 뺏어야 된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 코로나-19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더 많이 돌아다니면서 "저것도 가져야지, 저것도 가져야지"하면서 끝없는 불만족의 사이클을 돌다가, 사회적 거리 두기로 혼자 있으면서 사람들은 행동이 바뀌었다. 단 거 좋아하는 분들이 1000번 돌려서 '달고나'를 만든다는 거죠.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수고스럽게 하면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알았다. 사회적으로 원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가면, 우리 삶이 더 행복하다. 나는 그렇게 산다.

원하는 걸 확실히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럼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여기서 want(원하는 것)와 like(좋아하는 것)을 구별하고 싶다. Want는 시회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을 때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도 계속 생각나고 갖고 싶으면, like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질문해 보자. 오늘 아침은 한 권의 책을 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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