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상은 경쟁으로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13. 21:46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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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12일)

드디어 <<주역>>의 <건괘>와 <곤괘>를 '문언절'까지 읽었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과 집착이라면, 땅을 말하는 <곤괘>는 '물러남'이다. 다르게 말하는 내 안의 '양'의 기질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이라면, 내 안의 '음'의 기질을 발동시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할 일만 하고 물러서는 거다.  우리가 물러설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 이어질 가치와 정신을 만드는데 집중하기 위해서 물러서는 거다. 그 물러섬을 통해 '혼자 있음'의 힘을 키워야 한다.

세상은 경쟁으로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름다운 문화가 있어야 조금씩 나아진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자유의 심리학을 익혀야 한다. 그래 요즈음 나는 다음 세 권의 책을 정독하고 있다.
- 마이클 해리스의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solitude:in pursuit of singular life in a crowded world)>>. 홀로 있음의 가치를 되찾자는 거다. 홀로 있는 시간이 없는 삶은 위축된 삶이라는 것을 알자는 거다. 동시에 무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저항하자는 거다. 클라우드의 빅데이터로 이루어진 구글의 렌즈를 깨부수고 자신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자는 거다.  내 안의 '음'의 가치와 함께 홀로 있음의 자유로움으로 더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대전환에 도전해 보자는 거다.
- 프랑스계 미국인인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nertus miniscules)>>. 인류는 평범한 중간의 이들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거다.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며,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중용의 '평범한 삶'을 가치 높게 평가한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을 찬양한다. 그건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길을 관찰하며 결과 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힘을 기르자는 거다. 그것도 내 안의 '음'의 기질을 키우는 거다. '땅'의 마음의 힘을 기르는 거다. <곤괘>의 용육(用六)에서 말하는 "이영정(利永貞)"이다. 즉 오랫동안 땅의 마음을 지켜야 이롭다. 그러니까 '평법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며,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땅의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 독일 작가 마티아스 뉠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대하여(Understatement)>>. 세상이 아무리 폭풍 같아도 고요히 자기 중심을 잡고 바로 서있는 사람, 모두 자기를 내세우느라 떠들썩한 세상에서 묵묵히 겸손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 말로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거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결국 모두를 이긴다는 거다.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세련되게 겸손 하려면 비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건전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타인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좌우되지 않아도, 타인의 인정 없어도 자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다는 거다.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한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한 사람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태도, 여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걸 믿는 거다.

어제는 <예술 사랑 토파즈>라는 단체의 정모에 다녀왔다. 개회를 하면서, 이동진의 <삶>이라는 시를 한 분이 낭송했다. 나는 우리에게 시가 있다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는 길에 시를 낭송한 분과 함께 차를 타고 왔다. 오면서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라는 시를 이야기하고, 그분이 직접 하여 녹화한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란 시의 낭송을 들으며 집에 오다 보니 시간이 짧았다. 오늘 이동진 시인의 <삶>을 공유한다.

삶/이동진

우리는
이렇게 기쁘게 살아야 한다

눈빛이 마주치면
푸른 별빛이 되고

손을 맞잡으면
따뜻한 손 난로가 되고

두 팔을 힘주어 껴안으면
뜨겁게 감동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 살아야 한다.

얼마나 길게 살 것이라고
잠시나마 눈을 흘기며 살 수 있나

얼마나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아픈 것을 건드리며 살거나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한다.

나 때문에 당신이
당신 때문에 내가

사랑을 회복하며
그렇게 기쁘게 살아야 한다

내 철학은 사람의 향기는 선행(善行)에서 나온다는 거다. 선행이 무엇인가? 예언자 미가가 알려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내가 만난 신이 요구한대로 생활하는 것이다."(<미가서> 6:8) 이를 요약하면,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한테 배웠다. 선행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tob)'인데, 이 말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라는 선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인향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매너,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삶이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자신 속에서 스멀스멀 자리 잡을 때가 있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해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라 한다. 그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미가서>는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여기서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그래 미가는 우리에게 겸손 생활을 요구한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작자 미상의 다음 글을 공유한다. "나는 인생을 즐기고자 신께 모든 것을 원했다. 그러나 신은 모든 것을 즐기게 하시려고 내게 인생을 주셨다. 내가 신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 하나 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당신 뜻대로라고 희망했던 것은 모두 다 들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