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의 소중함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봄꽃들은 한 마디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화려한 신호탄이다.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이지만, 봄만은 예외이다. 봄은 그 어느때보다 더 힘차게 치솟아 오른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봄 다운 봄이 출발 못하고 있다. 2020년의 봄 풍경은 여느 해와 사뭇 다르다. 반면, 나는 이름난 봄꽃 명소로 향하지 못한 발걸음이 머문 동네에서 해마다 그 자리를 지켰을 봄의 풍경을 만났다. 동네 골목길 어귀, 여염집 담벼락에 활짝 핀 꽃들은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기운을 알리고 있었다. 이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아서 눈 밝은 누군가는 감탄하고, 어떤 이는 미처 보지 못한 채 지나친다. 양손에 든 무거운 짐에 온통 신경이 쓰이거나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은 채 길을 걷는 동안 놓쳐버린다. 나는 아침마다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풍광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찬란한 이 순간들을 사진으로 모은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환경 운동가였던 에른스트 슈마허는 경제 성장이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해도 그 과정에서 환경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맹목적으로 성장지상주의를 따르던 걸음을 멈춰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 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며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통해 ‘작은 것’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강요된' 물리적 거리두기를 위해 사 놓은 아이슬링 래너드 커틴, 트리시 레너드 커틴의(박선령 역)의 『작은 것의 힘(사소한 행동의 심리학) 』을 주말에 읽으려고 책꽂이에서 빼냈다.
이 두 책은 ‘큰 것’의 가치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큰 것으로만 가득 채운 우리 사회가 잊고 있던 ‘작은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코로나19는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지금껏 달려온 우리 삶의 다음 이정표를 묻는 듯하다. 그 커다란 고민에 동네에서 만난 봄 꽃들이 나를 깨닫게 한다. “작은 것도 아름답다.” 어제 한겨레신문의 이정아 기자의 칼럼을 보고 한 생각이다. 그러나 나도, 이 기자처럼, 최근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멀리 못 가니 보이네, 동네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오늘 아침 사진은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피어있던 동백 꽃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서 볼 수 있다.
꽃처럼 살려고/이생진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코로나 19로 혼자 있는 시간들이 넘쳐난다. 그래 오늘 아침은 델포이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델포이(오늘날은 델리로 불린다)를 우주와 세계의 중심으로 믿었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가 두 마리 독수리를 반대 방향으로 날려 보낸 후 다시 만난 지점이 델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우주의 배꼽’을 뜻하는 옴팔로스(Omphalos)라는 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돌은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가 남편에게 제우스를 빼돌리고 대신 삼키게 한 돌로,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델포이는 원래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주관하던 성스러운 장소였으며 거대한 뱀 피톤이 여신을 대신하여 이곳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홍수가 끝나고 아폴론이 피톤을 활로 쏘아 죽이고 델포이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거대한 뱀 피톤에게는 아내 피티아(Pythia))가 있었다. 제우스는 자신의 남편을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피티아를 불쌍히 여겨 인간으로 몸 바꾸기를 해 준 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의 신전을 지키게 했다. 아폴론이 예언의 신 노릇을 하는 것은 이 피티아 덕분이다. 이 신탁소를 영어로는 '오라클(Oracle)'이라 한다. 이곳은 신이 여 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을 해주는 일을 한다.
아폴론은 피티아라는 여 사제를 통하여 제우스의 뜻인 신탁을 인간들에게 내려준다. 피티아는 월계수와 보릿가루를 태운 후 지하로 내려가 트리푸스(Tripous)라는 삼각의자 위에 앉아서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증기를 들이마시고 방문자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로 신탁을 내려주는데, 신탁에 대한 일체의 질문은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운명의 기로에 놓인 영웅들이 델포이를 찾아 와 그의 신탁에 따라 행동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숙명적인 신탁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오늘 아침에 하려는 이야기는 이 델포이에 새겨져 있다는 다음 세 문장이다.
- "너 자신을 알라."
- "무리(無理)하지 말라."
- "못 지킬 약속(約束)은 하지 마라."
첫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내가 알아야 할 대상은, 나하고 상관없는 외부의 것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1인칭이 아니 3인칭으로 관조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관조를 통해, 자신으로부터 걷어 내야할 자신과 자신이 되어야 할 자신을 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도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고백이었다.
둘째 '무리하지 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 도달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경지를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행동을 가려 분수(分數)를 지킨다는 말이다. 이는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찾아 몰입하라는 충고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는다. 자신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I am who I am이다.
셋째 '못 지킬 약속은 하지 마라'에서 약속은 자신의 임무를 알고, 그 임무를 말로만 아니라 행위로 옮기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자신과 혹은 타인과의 다짐이다. 약속하는 사람은 그 결과를 상상할 수 있고, 그 결과를 도출한 과정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을 통해 결과를 선언한다. 그에게 말은 그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못 지킬 약속이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상호간의 공식적인 선언이기 때문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파기하는 일은, 인간 사회의 근간인 신뢰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이번 코로나 19로 우리 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신뢰 문제였다. 국민들은 정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믿기에 사재기를 안하고, 또 사재기 하는 사람을 비판하면서 시민의식과 상호 신뢰가 빛을 발휘했다.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방식은 더 혼란을 야기 시킨다. 한 명도 안 버리고 끝까지 챙기려 했던 정부의 대응이 신뢰를 얻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 가로 관심이 집중되고, 약자일수록 자구책을 구하는 데 몰입하면서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앞에서도 이미 말했던 것처럼,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진짜 무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고, 무리하지 않으며, 내를 배려하고 나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무리하지 않고 절제를 할 수 있다. 즉 멈춤을 알고, 현실을 잘 직시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제의 한도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는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유성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이생진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