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11. 08:42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우리는 이날을 '까치 설'이라 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동요가 있기 전에는 '까치 설'이 없었다 한다. 옛날에는 '작은설'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다 한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이 있는데, '아치설'의 '아치'의 뜻이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엉뚱하게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이 날, 우리들에게 설빔으로 새 옷을 사 주셨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런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까운 사람들끼리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

내일은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그래 4일간 연휴인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며 격리된 일상을 해야 한다. 그래도 설날은 명절이다. 다행이도, 나는 딸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평소에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나름 즐기고 있다. 어제는 깻잎 전에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을 즐겼다. 대단한 궁합이었다.

설날은 '낯설다.‘의 설에서 유래한 처음 맞이하는 ‘낯 설은 날’이라고 하는 뜻과 ‘서럽다’는 뜻의 ‘섧다’에서 '늙어감이 서럽다'는 뜻이 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삼가다'라는 뜻을 지닌 '사리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각종 세시풍속 책에는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조신하게 하여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이라 한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조용하게 연휴를 보낼 생각이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공지영의 책 제3부, "나는 기필코 해답을 찾아야 했다"로 넘어간다. 대학에서의 밥벌이를 그만두고, 나는, 공지영처럼, "나는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나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그런 고민들을 공지영의 산문집에서 만났고, 책을 두 번째 읽고 있는 중이다. 여러 가지의 의견이 나와 너무 같아서 이다.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늙어감은 공평하다. 젊은 시절 아름다움을 구가하면 할수록 그들의 노쇠는 더 두드러지고, 인간의 내면이 밖으로 배어 나온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얼굴은 성형이 아니라 내면이 결정한다. 그 내면이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건 오랜 시간 걸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노년을 맞고 싶다면 내면을 가꾸어야 한다. 어쨌든 50이 넘은 후의 사람은 진심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새해에는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하고 싶다. 그리고 <장자>의 "덕충부"에 나오는 애태타처럼 살고 싶다. 두 가지이다. 하는 "나서서 주창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생각이다. '나'라는 자의식에서 풀려나고 싶다. 마치 물처럼 말이다. "빈 배"처럼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갈" 생각이다. 두 번째는 "양행(兩行)하는 사람, 양쪽을 한꺼번에 보는 사람"으로 여유롭게 살고 싶다.


신년 기원/이성부

시인들이 노래했던
그 어느 아름다운 새해보다도
올해는
움츠린 사람들의 한해가
더욱 아름답도록 하소서

차지한 자와 영화와
그 모든 빛나는 사람들의 메시지보다도
올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소망이
더욱 열매 맺도록 하소서

세계의 모든 강력한 사람들보다도
쇠붙이보다도
올해는
바위틈에 솟는 풀 한 포기,
나목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새 한 마리,
억울하게 사라져 가는 한사람,
또 한사람,
이런 하잘것없는 얼굴들에게
터져 넘치는 힘을 갖추도록 하소서

죽음을 태어남으로,
속박을 해방으로,
단절을 가슴 뜨거운 만남으로
고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우리들의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역사 속에 그리움 속에
한 점 진하디 진한 언어를 찍는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결정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 쫓기는 사람은 악마의 입 속에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둘을 구별하고 나면 인생은 엄청 달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을 살피고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외에는 없다.

헤겔은 "이세상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영원한 진리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시를 썼다. "꽃은 모두 열매가 되려 하고/아침은 모두 저녁이 되려 한다/이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변화와 세월의 흐름이 있을 뿐". 그러니 사라져가고 변화하는 것은 축복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한 번 상상해 봐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건 엄청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과 내 욕망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스톱(stop)"의 마법을 걸고 싶어 한다. 그걸 알면서도, 십년 전의 내가 상상하던 내가 전혀 아닌 것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부질없이 10년 후의 계획을 세운다. 그러니 막 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가변성, 인간의 유약함, 이 모든 것을 겸손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는 거다. 나는 외롭든,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나를 괴롭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그 사람이 나일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사생활을 지켜주어야 한다. 특히 비밀번호 알아내서 휴대폰 뒤지고 그러면 안 된다. 그건 그 사람이 화장실 있을 때 잠가 놓은 문을 따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한 거다. 그게 친밀감은 아니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이 통하는 아름다운 거리가 없으면 두 사람은 이내 똑같이 시들어버리고 만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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