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11. 08:41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Bong Joon Ho, Parasite" (봉준호, <기생충>).  비영어권 최초로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을 받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숫자로 4관왕이다. 봉감독의 수상 소감이 인상적이었다. 함께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는 말을 하며 경의를 표했던 것과 마지막 유머도 인상적이었다. "아카데미 측에서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 톱으로 잘라서 나누고 싶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술을 마실 것"이라며 "오늘밤 취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도요." 그래 나도 내가 좋아하는 '꽃 향기'나는 화이트 와인 <게브르츠트라미너>를 열어 마시기 시작했다. 마침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했다. 늦은 밤까지 와인에 취했다.

점심 시간에 나는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를 보았다. 예상치 못한 수상에, 생중계를 진행하던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그저 탄성만 질렀다. 그가 작년에 이 영화에 내린 한 줄 평론을 다시 꺼내 본다. "기생충: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프랑스어로 "Tu es parasite(넌 기생충이야")라는 말은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니다. 그냥 "넌 주체적이지 못해, 왜 독립적이지 못해" 정도의 뉘앙스이다. 그런데 우리 말로 <기생충>이라 번역하면 좀 역겹다. 난 기생충에 대한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으로 외면했었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번역된 제목이 'parasite'였다. 이 단어를 <프랑스어 사전>에서는 '식객, 기식자, 기생충 같은 존재'로 풀이한다. 우리 나라는 다소 아이들을 기생하는 인간으로 키운다. 조벽 교수가 하는 말이다. "내가 먹여주고 태워주고 입혀주고 뭐 사주고 다 할 테니까 넌 그냥 앉아서 공부만 해. 공부해서 남 주냐? 오로지 너만 위해서, 네 주변에 있는 거 네가 다 끌어다 써라." 이런 말을 듣고  큰 사람이 기생하는 존재의 특성이다. 기여하는 존재가 되게 하려면, '공부해서 남 주냐"며 이기심을 부추기는 풍토를 반성해야 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훗날 돈도 벌고 얻을 거 다 얻은 후에.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기여하겠다는 것은 헛소리가 되기 쉽다.

<기생충>의 배우 송강호는 "제목은 '기생충'이지만 '공생'과 '상생'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충'보다 '기(奇)'에 집중해달라고 했다. 식물의 세계에서 남의 몸에 붙어 양분을 빼앗아 살아가는 식물을 '기생 식물'이라 한다. 일은 하지 않고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기생충 같은 사람'이라 한다. 기생의 관계에서 양분을 빼앗기는 쪽을 '숙주' 또는 '임자몸'이라 하고, 양분을 빼앗는 쪽을 '기생' 또는 '더부살이'라고 한다. 식물계에서 기생 식물은 잎이 없으며 숙주 식물보다 빨리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드는 약삭빠른 식물이기도 하다.

사람도 '기생하며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이가 있다. 기생과 공생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기생하는 사람으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의 염치가 있어야 한다. 숙주의 입장에서 볼 때 기생이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 기생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생하는 사람은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환경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기생이든, 기여이든, 상생이든, 공생이든, 서로 존엄 지키면 '기생'은 '상생'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기생과 공생을 가른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에 나는 동의한다. 난 지난 해부터 내 인생을 더 이상 '기생'하는 삶이 아니라, '기여'하는 사람(contributeur, contributor)으로, 내 인생의 나머지로 채우려고 다짐했다.

봉준호는 이름보다 성, "봉"이 좋다. 프랑스어 'Bon'은 '좋은(good)'이란 형용사이다. 그래 Bon자가 들어가면 다 인사이다. 봉 주르(Bonjour), 봉 스와르(Bon soir) 등등이다. 좋은 준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이들 힘들어 하는 이 때 받은, 기쁜 소식으로 가슴 뭉클했던 어제였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별 볼일 있는 별 볼 일"이었다. 봉준호는 '별'이다.

별 볼일 있는 별 볼 일/오은

별달리 할 일이 없으니 이별에 대해 말하려 해. 이 별에서 벌어졌던 이별에 대해. 별것 아닌 일일지도 모르지. 이 별에선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천만차별을 받으니 말이야. 천만 명의 인구 중 과연 몇 명이나 별이 될 수 있었을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도 말이야. 그러다 별이나 달지 않으면 다행이지. 알다시피 별일이 다 터지는 별이잖아.
저길 봐, 별을 따려고 눈이 빤짝빤짝 빛나는 사람들을. 별 볼일 없으면 별이라도 함께 보자고 추파 던지는 치들도 있지. 별이 있다면 말 그대로 유별난 소리. 그런데 과연 하늘을 봐도 별을 딸 수 있을까. 이따금 똥 흘리며 떨어지는 별들이 있긴 하지만. 바라보고 있자면 별스럽게도 눈물이 핑 돌아. 그렇게 넋을 놓다가 불현듯 큰 별이 지면 고개 숙여 다 같이 묵념을 해.
그새 별난 사람이 또 샛별을 낳았대. 난 그 별로 날아갈 테야. 밝기별로 늘어서서 광나는 피부를 뽐내야 하는 것은 영 별로지만. 거기서 별 중의 별, 그러니까 별의별처럼 빛날 테야. 별미처럼 블랙홀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질 테야. 은하계의 마지막 별종처럼 사라지며,  각별한 마음을 담아, 작별.

*윤동주의 『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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