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글쓰기는 그 자체로 네트워크, 즉 세상과 연결하는 일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7. 08:56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태들에 대하여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고집스런 내 편견과 선입견을 사슬을 끊고 풀어헤치려"는 목적이다. 그리고 방법론은 "고전들 속에서 고수들이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집대성 했었는지를 동시에 파헤치는 노력을 쉬지 않는다." 내가 좋아 하는 이순석 부장의 담벼락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래 나도 고전을 꾸준히 읽고, 사유하고,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 부장님은 공학도이다. 그래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공학자들은 그걸 구조적 관점에서 정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구조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태라는 현상들을 일어나게 하는 몸체에 대한 전략적 배치이기에, 개별 사태를 모두 기록하는 소비되는 방대한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방법론이자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조적 축적 방법론이, 지구 생명들에게, 지금과 같은 생태계의 운영 방법론을 터득하게 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조상들의 특질들과 나의 특질들이 구조적 결합을 통하여 새로운 특질들을 생성하게 하여 또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방법론이다. 그 방법론이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더 선명해 져서, 세대가 이어질수록 시행착오를 줄이며 보다 다양한 새로운 개별성을 생성하게 하고 또 더 역동적인 보편성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하여, 우리라고 할 수 있는 인류와 지구생명의 오늘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방법론으로서의 '공학(에지니어링)'이고, 이 공학에 철학이 결합되어야 한다.

다음의 사유로 잘 넘어간 것을 보면, 이 부장님은 공학도이면서 철학자이다. "이런 가운데 발견하는 가장 특별한 것은 '오늘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오늘을 있게 한다'라는 생각이다. 모호함에 나를 먼저 던져 놓은 것이, 남들이 만들어 놓은 '-다움'을 쫓는 오늘의 삶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되기'라는 진취적인 오늘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하기에, 우리들 담벼락 대부분의 글들은 '넌, 이런 것 몰랐지'가 아니라 '이것은 당신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 일으키나요'라는 질문이다."

글쓰기는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누군가에게 말 걸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네트워크, 즉 세상과 연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인생과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만나고서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그걸 언어와 문자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글이 제대로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가 먹을수록 호기심을 잃는다는 점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안 죽는 사람들이 사는 섬에 갔더니, 안 죽는데도, 80살이 넘으면 다 호기심을 버리고 살 더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난 ''-다움'에서 '-되기'로 건너 가자'는 말에 크게 방점을 찍는다. 최진석 교수는 틈나는 대로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 머무름 없이 건너가는 존재,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 익숙함을 벗고 낯선 곳으로 나서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이 머무르지 않고 건너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관찰력이고, 관찰하려면 궁금증이 있어야 하고, 궁금증은 세계 누구와 공유되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움'이란 한 존재가 사회 내에서 마땅히 갖춰야 할 것으로 기대하는 행동 양식이자 존재 양식이다. 한 개인 내면에서는 정체성의 중핵을 이루고, 한 사회에서는 규범의 기준을 형성한다. 흔히 상식(common sense), 즉 공통 감각에 기대어 생겨나고 확산되며 강제된다. 그러나 '-다움'은 영원하지 않다. 공통 감각이 바뀌면 '-다움'도 달라진다. '인간 다움'에서 인간은 한때 남성, 백인, 정상인, 이성애자를 가리켰으나 오늘날 문명세계에서는 여성, 유색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차별 없이 포괄한다. 이제 타고난 신체 조건이나 특정 취향을 빌미 삼아 '-다움'을 밀어붙이는 것은 몰상식한 야만 행위가 됐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자신이 바라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다움'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데서 온다. 최근 책의 트렌드인 '나 다움 에세이 열풍'은 그동안 한국 사회의 공통 감각이었던 '가부장제 피로 사회'에 대한 반발과 항의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흔히 사회에서 규정하고 기대하는 여러 '-다움'을 잘 수행해 무난한 인생을 사는 것을 행복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건강한 삶이란 스스로 '나 다움'을 설계하고 실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나날이, 천천히, 꾸준히 단련할 때만 생겨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특정 형태의 삶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다움'이 넘쳐서 불행하다. 어이없게도 최근에는 '피해자 다움'을 강제하는 일마저 있다. '각자가 바라는 대로'를 존중하는 것은 좋은 공동체의 조건이다.

'나 다움'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나 다움'을 인정하는 사회로, 그 속에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다움'을 쫓는 삶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되기'가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이건 네가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고유한 나'가 된다. 그 길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섬기며,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오늘 아침 시를 소개한 곽제구 시인은 이렇게 덧붙임을 했다. "마리안 수녀님과 마가렛 수녀님을 생각하면 인간인 내 마음 안에 백합꽃이 핍니다. 두 분은 20대에 소록도에 들어와 70대까지 사십여 년 세월을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바쳤지요. 장갑이나 마스크 없이 환우들의 고름을 직접 짜고 맨손으로 환부에 약을 도포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평생 TV 수신도 하지 않았지요. 소록도 식당에서 두 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다. 두 개의 아우라가 주위에서 펼쳐지더군요. 인간인 내가 인간을 보며 마음 안에 백합꽃이 핀 적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두 분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상도 두 분의 숭고한 인간적 행위를 대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그냥 인간입니다."

이처럼 평생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살아온 두 분은 지난 2005년 11월 22일 홀연히 그들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한센병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긴채.

마리안, 마가렛/강신애

문드러져서 문딩이라지요
진물 흐르는 얼굴, 등허리
맨손으로 문질러 약을 발라주는 부드러운 손

환자들은 미안해 울고
없는 죄가 씻긴 듯 울고
한 달에 한 번 수탄장에서 울었지요

코발트블루 바다 바라보다
근원에 닿던 사람들
새벽, 밀려가던 파도의 서늘함이 밴
편지에는
늙어 짐 될까 떠난다는 말씀만 방울방울 맺혀 있었죠

낯선 모국에서
백사청송 그리움의 기슭에
암을 들인 마리안

요양원 찾아
소록도를 꺼내면

치매의 마가렛
방긋 웃지요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언젠가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옮겨 적어둔 것이다. 그래 나도 틈만 나면 걷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이란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영안실로 돌아가는 그런 지루하고 멋대가리 없는 여정이 아니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길을 걷다가 어느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인류에게 문명이 시작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개의 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1. 정복자들의 길
2. 순례자의 길-타인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은 내면과 만나고, 자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한 순례의 길
3. 장사꾼들의 길-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물건을 이동시키는 길
4. 집시와 방랑자들 그리고 유목민들의 길

왜 우리는 길을 나서는가? 집을 떠나 새로운 시, 공간을 만나야만 거기에서 오는 낯섦, 설렘 그리고 충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주침, 클리나멘(2021년 1월 31일자 글쓰기 참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주침이 있어야 인간은 변용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늘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 유동성을 신체에 새긴 사람들이다. 사실 인간은 본원적으로 유목민이다. 그런데 약탈자들이 등장해 제국을 건설하는 바람에 국가와 역사에 매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역사가 없다. 그런 존재들이 한 곳에 머무르면 지루하고 권태로워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런데 왜 집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할까? 집이 일종의 투자 상품이 괸 것 때문이다. 집이 '사는 곳(liviing place)'이 아니라, '사는 것(something to buy)이 되었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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