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높이가 우리들의 삶의 높이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원래 교육이란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공공 의무 교육이란 이름으로 교육의 본래 의미가 훼손되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는 선진국은 학교 교육을 대대적으로 손 보고 있다. 우리도 지금이 교육을 개혁할 때이다. 배철현 교수의 이번 주 칼럼을 읽었더니 교육에 관한 생각들이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된다. 함께 공유하고 싶다.
(1) 원칙적으로 "교육은 사회가 정해 놓은 규칙의 순응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서서히 조각 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학생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은닉된 독창적인 영혼을 일깨워, 정답이 없는 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자기 나름의 정답을 더듬도록 격려하는 친절이다. 그것은 삶의 여정에 자신만의 독보적인 지도를 만들도록 응원하는 배려이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영적인 인간으로 서서히 만드는 인내다. 교육은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대학 시험 철이다. 난 관심이 없다. 대학 입시 생이 주변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문운동가로 교육 문제를 필링하고 싶다. "대학은 부모 집을 떠나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업을 모색하는 실험장이다. 교수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찾아 나선 학생들을 훈련 시키고 격려하는 도우미다. 교육이란 자신과 상관없는 지식을 효율적으로 암기 시키는 강요가 아니라, 그 학생의 성향을 파악해 그에게 어울릴 만한 다양한 직업이나 취미를 소개하고, 취사 선택하게 유도하는 친절이다. 교육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에듀케이션(education)은 그 학생이 지닌 유일무이한 특성을 밖으로(e-) 유도하는(ducation) 체계적인 자극이란 의미다."
그러니 교육은 개개인에 대한 맞춤 교육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맞춤 교육 대신 서구에서 의무 공공 교육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공공 교육의 시작은 귀족들의 향유였던 지식을 대중에서 널리 펼치는 현대 문명과 문화의 기반이자 진보라고 칭송 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학식, 지적인 능력, 그리고 그것에 어울리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살펴 볼, 모두가 이 낙관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 교육의 역사와 그것이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면, 그 주된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
(2) "공공 교육의 목적은 각기 다른 개인의 역량의 발굴이 아니라,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 제어 수단이었다. 그 목적은 자기 삶의 목표를 발견하도록 자신이 환경에서 알게 모르게 얻는 편견을 깨우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한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평균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지닌 개성이나 독창성은 놀림과 제거의 대상이다."
(2)-1 그런 의무, 강제 교육은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시작됐다.
스파르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돼 군사 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 아이들에게 덕이란, 다른 아이들과 경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나아가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의 군인들과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2)-2 오늘날 우리와 다른 다양한 분야를 갖춘 현대 공공교육 시작은 16세기 독일이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대중교육 교재로 사용했다. 그는 당시 독일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공 의무 교육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는 행정당국이 국민들을 학교로 보낼 것을 주장합니다. 만일 정부가 시민들을 창과 총을 드는 군사훈련을 강요하고 유사시 군 복무를 시키는 것처럼, 시민들의 자녀들을 학교로 보낸다면, 우리 도시들과 공국들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악마와 (지적으로 영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교육으로 통해, 악마들과 물리적 싸움이 아닌, 지적으로 영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힘을 키워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점이 내가 인문 운동을 하는 이유이다. 무식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동시에 내 삶을 사회가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힘, 인문 정신을 길러 인문적 시선이 높아져야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시선의 높이가 우리들의 삶의 높이라 본다.
루터는 국가 공권력을 이유로 한 의무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루터교 교리를 주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많은 독일 공국들은 최초의 공공학교를 세웠다. 루터는 현대적인 공공교육을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이 교육을 통해 특정한 세계관을 주입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3)-3 현대 공공교육의 또 다른 축은 18세기 초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다.
북 독일 연방의 의장이며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그는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1717년 전국적인 의무 교육을 시작했다. 루터의 공공 교육이 공권력을 이용한 주입 교육이라면, 빌헬름 1세의 공공 교육은 동일한 시민을 생산해 내는 공장식 학교 교육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초,중고 학교 건물은 공장 모양이다. 학교는 공장처럼 직사각형이며, 교실은 정사각형, 복도는 선형이다. 선생은 교실 맨 앞 강단 위에 서서 학생들에게 정보를 주입 시키고 암기를 강요한다. 선생은 어디에서 나 볼 수 있도록 계단 식 교실의 아래 중앙에 있거나, 평면 식 교실의 맨 앞 단위에 서서 지식을 전달한다.
공장식 교육 모델은 동일한 교재(국정교과서), 국가고시, 과정보다는 점수 획득, 질문보다는 해답, 진리 탐구보다는 권위에 복종, 혁신이나 진보보다는 획일과 정통을 우선 가치로 삼는다. 프로이센에 효과적이었던 이 모델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한 귀족 교육 중심이었던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후, 다시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전파돼 주요 교육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왜 이런 학교 문법을 가지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된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이런 교육 문법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자이자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교육 행정 교수였던 엘우드 패터슨 커벌리는 1916년 <공공교육행정>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교육은 공장들이다. 가공되지 않는 원료들(어린이들)이 다양한 삶의 요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런 제조를 위한 구체적인 조건은 21세기 문명의 요구에서 결정된다. 학교가 할 일은 이 구체적인 조건에 맞게 학생들 개조하는 것이다." 공공교육자들은 99% 학생들을 로봇으로 봤다. 개성을 제거하고 사회가 과학적이며 효율적이라고 결정한 공공교육을 수용하고 따른 것이 최상의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를 이렇게 비판한다. "학교는 당신이 사회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광고 대행업체다." 20세기가 낳은 400명의 천재들의 교육 과정을 다룬 <세계적인 인물들을 어떻게 교육 되는가> 라는 책은 5명 중 3명, 즉 60%가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학교 교육을 송장이나 견딜 수 있는 복종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학교 교육은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게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폭력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창문이 없는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선생이 하는 말을 유심히 경청하고 진리라고 무조건 수용하는 극기를 훈련한다. 이렇게 잘 정리할 수 있도록 칼럼을 써 준 배철현 교수를 늘 존경하고, 그로부터 많이 배운다, 감사하다. 21세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고 팬데믹 이후 새로운 뉴-노멀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도 대대적인 교육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을에서 길지만 공유한다.
공장식 교육을 받은 우리는, 오늘 아침 시처럼, "쥐약을 덥석 삼키듯이, 불 난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르고 파티를 즐기듯이, 떼를 지어 절벽으로 내달리는 레밍처럼, 집어등 불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우리 역시 현란한 빛과 향기에 취해 떼거리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방향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먼. 산. 바. 라. 기.]). 오랜만에 읽어 보는 유하 시인의 시이다.
오징어/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지난 해 12월 23일 이후, 기회가 안 생겨, 다음의 7번과 8번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 7번 "문화인류학적 여행을 경험하라"와 8번 "'나'에서 '너'로, '우리'를 보라"는 문제를 둘 다 살펴보고, 이 이야기는 오늘 로 멈춘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능력, 즉 공감 능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달부터 나는 여러 번에 걸쳐서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나를 만드는 법으로, 이진성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8가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이진성 작가가 말하는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이 8 가지이다.
1. 디지털을 차단하라
2. 나만의 '평생유치원'을 설립하라
3. 노잉(knowing)을 버려라. 비잉(being)하고 두잉(doing) 하라
4. 생각의 전환, '디자인 씽킹(designe thinking)' 하라.
5. 인간 고유의 능력을 일깨우는 무기, 철학 하라
6.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
7. 문화인류학적 여행을 경험하라
8. '나'에서 '너'로, '우리'를 보라
문화인류학적 여행이란 적게는 몇 개월, 많게는 몇 년 동안 현지에 거주하면서 현지인들의 삶에 깊게 녹아 드는 여행을 말한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진짜 문화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2014년에 개교한 미네르바 스쿨의 교육 과정이 문화인류학적 여행 그 자체라 한다. 이 대학의 기숙사는 한국의 서울,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영국의 런던, 독일의 베를린, 대만의 타이베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도의 하이데라바드에 있다. 학생들은 4년 동안 이 도시들에서 거주하면서 현지 문화와 산업을 배운다. 물론 인문학, 수학, 과학, 인공지능 등도 배운다. 교육방식은 플립러닝이다. 플립러닝은 교과서와 강의가 사라진 수업을 의미한다. 수업 시간에는 토론을 한다. 학생들은 집에서 미리 공부해온 내용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하고, 교수도 학생들 사이에 앉아서 함께 토론한다. 토론은 인공지능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공감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단 온라인 화상 토론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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