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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우아한 문화활동이 아니다.

7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글입니다.

'참나'를 찾는 여행

난 인문운동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금은 불의한, [정의롭지 못한] 시대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연대할 때이다." (2016년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 124명 시국선언)

어떤 상황?
(1) 소통 부재로 인한 민주주의의 질식
(2) 세월호 참사 진실 은폐
(3)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4)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5) 기습적으로 강행 처리한 사드 배치
(6) 권력형 비리 만연
(7) 사회 양극화 현상 심화

그래서 저항해야 한다. 여기서 저항은 애정에서 비롯된 행위이며 세상이 더 선하고 인간적인 곳으로 바뀔 수 있다는 굳은 신념 없이는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인간성의 회복, 공동선의 가치가 실현되는 참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이 '저항하는' 인문학적 정신이다. 그 정신으로 모든 국민이 나서서 서로 연대하고 저항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우아한 문화활동이 아니다. 나, 타자,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과 마주하고 씨름하는 치열한 행위이며, 비판적 성찰과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비로서 조금씩 이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기투하고 개입하는 사유이고 실천이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확실성을 경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사유하기, 고정된 정답 찾기보다 새로운 질문 묻기를 배우기, 그리고 상투성에 저항하고 자명성에 물음표 붙이기 등을  통해서 비로서 그 싹이 돋아나게 된다.

인문학을 단순한 문화활동의 영역으로만 이해할 때, 그 인문학은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된다. 그러한 '탈정치화' 되고, '탈역사화된' 인문학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게 하고, 구체적인 변화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실천적 삶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탈정치화'하면 인문학이 지닌 중요한 비판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개입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한다. 삶에서 골치 아프다고 '탈정치화' 하면, 세상은 안 변한다.

인문학의 기능은 비판적 성찰, 해답 찾기가 아닌 새로운 물음 묻기를 통한 세계 개입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정의, 평화, 평등, 연대의 가치를 더 확장하고 실천하기 위한 비판적 저항이다.

인문학 정신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고정하려 하는 것과 제한하려하는 것, 절대적인 것의 위험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인문학 정신은 이런 것들이다.
(1)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독'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2) 이성적으로 사유하기 : 자신을 말과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3) 물음 묻기, 즉 질문하기: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질문 받는 사람을 사유하게 만들고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찾게 만든다. 나쁜 질문은 "예 혹은 아니오"로 단정 짓게 만드는,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질문에 답을 내릴 때 기억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1) 모든 답은 잠정성을 갖는다.
(2) 모든 답은 부분성을 갖는다.
(3) 모든 답은 특정한 정황 속에 매여 있다.

따라서 인문학 정신은 (1) 확실성을 내려놓고 불확실성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끊임 없는 불안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하는 수고가 있다. (2) 고정된 정답보다 새로운 질문으로 묻기를 하는 것이다. (3) 상투성에 저항하고 자명성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