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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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려고 했다. 좀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좀 세상 일을 비우고 싶었다. 그런데, 비웠더니, 방심(放心)하는 사이에 또 너무 많이 채워졌다. 이젠 다시 비워야 할 때이다. 이것 저것 너무 일을 많이 맡았다. 특히 시민단체의 대표직은 너무 어렵다. 내 체질이 아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대전문화연대 창립 15주년 후원의 밤>인데, 사람들에게 후원을 부탁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에는 누구 누구에게 말해 보아야지 하지만, 실제로 말이 안 떨어진다. 시간은 다가오고, 후원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걱정이고 스트레스이다.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젠 그런 일을 접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실천 가능한 일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인문운동가로 글을 더 많이 쓸 생각이다. 좀 더 행복하고 싶다.
인간으로 태어나 행복은 보편적인 권리이다. 가장 잘 표현한 것이 1776년 7월 4일 보스턴에서 작성된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온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실을 분명히 직시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양도할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그 중에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이 있다." 유엔은 매년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는 경제적 소득,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자유, 관용, 부정부패 정도 등의 항목을 토대로 각 나라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나름대로 측정하고 수치화해서 발표한다. 지나 3월에 발표된 ‘2019 세계 행복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행복지수 10점 만점에 5.895점을 받아 54위에 올랐다. 핀란드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이어 상위권에 올랐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이 25위에 올라 가장 순위가 높았고 싱가포르(34위), 한국(54위), 태국(52위), 일본(58위), 중국(93위) 등이 뒤를 이었다.
나는 지난 연휴에 나 나름대로의 <행복 공식>을 만들어 보았다. 행복=주관적 안녕감의 토대(정치에 의한 사회 시스템)+개인의 정서(가족들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인한 자존감, 용기, 자신감)+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행복을 위한 노력.
우연히 인터넷에서 접한 김희관 변호사의 칼럼(한국일보, 9월 17일자 <행복방정식>)이 내 생각과 같았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 해도, 그러한 주관적 느낌을 형성하는 사회적, 객관적 여건과 환경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해 전염병에 노출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행복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 변호사의 칼럼은 이렇게 마무리 한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행복의 조건으로 건강, 빚이 없음, 깨끗한 양심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들면서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고 했다. 돈의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 아닌가. 그런 그가 행복의 조건으로 “많은 돈”이 아니라 “빚이 없음”을 꼽았다는 것은 의외다." 김 변호사는 애덤 스미스를 원전을 안 읽은 것 같다. 그래 그의 주장을 아래에 첨부한다. 김 변호사의 글을 끝까지 다시 읽어 본다. "예전보다 더 잘 먹고 잘살게 되었음에도 덜 행복한 것 같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성공과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나 자신에 만족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자꾸 비교하려 들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 아닌가. 행복 방정식에서 삶을 대하는 개인의 시선과 태도가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 문장은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은 말레네 뤼달의 『덴마크 사람들 처럼』에 나오는 <행복 십계명> 중 하나인 "현실주의자가 되어라"는 주장을 공유한다. 그녀는 삶 속에서 자신의 전투는 자신이 선택하라고 한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전투에 직면한다. 그렇다고 모든 전투에 응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전투, 다시 말해 인생에 무언가를 가져다 줄 전투가 무엇인지 선택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밖의 나머지는 무심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몇 가지 문장을 인용해 본다. "최고가 아니어도 만족한다." "덴마크 사람들은 단순한 삶을 좋아한다. 물욕도 권력욕도 없다." 그러니까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정하는 순간 행복에 성큼 다가간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나 지불할 비용에 대해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비치 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나도 몇 개의 파라솔은 접어야 한다. 현실주의자로 "가볍게 가을로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구월의 시/조병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 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조병화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필링(peeling)한다. 유범상 교수의 『필링의 인문학』이 잘 설명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말하는 인간은 '호의를 베푸는 이기주의자'이고, 『국부론』의 시장은 이런 인간들이 뛰노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곳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기심이라는 표현이 'selfishness(제멋대로임, 이기적임- 남의 이익을 침해해서라도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아니라, 'self-love(자기애, 자기에 대한 사람)'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은 self-love이다. 그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남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남을 대할 때도 다르다. 남이 내게 손해를 입히면 싫은 것처럼, 나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건 양심이 충고를 하는 소리이다. 요약하면, 애덤 스미스가 전제한 것은 사장에 나온 인간이 selfishmess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self-love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게 호의를 가진 자기사랑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시장이 속임수가 없는 공정한 가격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속에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때문에 독점도 없고 착취도 없다. 임금이나 이윤이 특정한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도 제한된다. 그리고 분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게 한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찾은 신의 질서의 법칙이다. 이 때 국가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공공기관과 공공사업 운영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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