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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랑의 흔적/유하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7월 2일)

<성학 십도> 제2도 "서명"에 이런 말이 나온다. "濟惡者不才(제악자부재)" 이 말은 '악을 저지르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훼손하는 자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재(才)는 타고난 자질을 의미한다.  인간은 우주 건곤(乾坤, 하늘과 땅)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우주적 자질과 능력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의 발휘를 통해 우주의 창조적 과정에 동참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나쁜 짓만 일삼는 자들은 자기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오늘 오전에 함께 읽은 <장자>의 "덕충부'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추남 애타타의 덕성을 설명하기 위해 공자가 한 말이다. "저는 언젠가 초나라에 사자로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돼지 새끼가 죽은 어미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얼마 후 돼지 새끼는 놀란 표정으로 모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어미 돼지가 자기들을 봐 주지 않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그 외형이 아니고, 외형을 움직이고 있는 내부의 근본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화이다. 천천히 잘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돼지 새끼들이 달아났다는 것을 보면, 진정한 사람됨은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 때묻지 않은 본연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애타타는 비록 외모가 지극히 흉측하지만 그 본바탕에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재(才)라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才全)'이라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 답게 하는 기본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없는 사람은 삶이 아니고, 살아 있으나 죽은 삶과 같다는 것이다.

맹자는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차마 몹쓸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그 요인을 꼽았다. 함닉(陷溺), 곡망(梏亡), 방실(放失)이 인간을 불선(不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1) 함닉:  말 그대로 하면, ‘물속으로 빠져 들어 감'을 의미한다. 요즈음 말로 '탐욕'이다. 욕망의 재배치를 통해 소유와 증식보다는 자유와 순환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래야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맹자는 “풍년이 든 해에는 자제들이 온순해지는 경향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해지는 경향이 많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함닉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나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 속으로 마음이 빠져들다 보니 성선의 기초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이 거짓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그런 예일 것이다.

(2) 곡망:  선한 마음을 기르지 못하고 소멸된다는 말이다. 선행(善行)을 키우지 않는다. 맹자는 제나라에 있는 우산(牛山)을 들어 설명한다. “우산은 원래 수풀이 우거진 산이었다.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도끼로 베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또 사람들이 방목한 소와 양들이 나무 잎을 뜯어먹으니 저처럼 반질반질해진 것이다. 이걸 보고 원래부터 우산에 나무가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어찌 산의 본래 모습이겠는가.” 우산이 원래 아름다운 산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본바탕도 선한 상태였다. 그런데 죄인에게 형틀을 씌우듯 욕심이 선한 마음을 구속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3) 방실: 어리석음, 게으름과 같이 놓아버린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방심과 같은 뜻 같다.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와 책임의 꾸준함이 없다. 말 그대로 마음에 방학을 주고 생각없이 산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지 않으니 슬프도다. 사람은 개나 닭이 집을 나가면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리고는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바로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잃어버린 선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 학문의 길이라는 맹자의 울림이 크다. 양심을 잃은 지식인들이 자신을 다잡는 데 이만한 경책이 없을 듯싶다.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은 인간에게 축복이다. 나쁜 환경과  탐욕으로 인해 그 본성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으로 변한 것은 재난이다.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재앙이다. 그런 재앙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세계일보일보 논설위원의 글에서 만난 내용이다.

어제는 내 삶의 원칙이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건데, 5 가지 일들이 겹쳤다. 촌음(寸陰)을 아껴가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어제 공유했던 "해인왈적(害仁曰賊)"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사랑을 해치는 것은 하나의 범죄 행위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과 같다. "사랑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사랑의 흔적/유하  

생선을 발라 먹으며 생각한다
사랑은 연한 살코기 같지만
그래서 달콤하게 발라 먹지만
사랑의 흔적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구나
나를 발라 먹는 죽음의 세상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열애가 지나간 흔적 하나
목젖의 생선가시처럼 기억해 주는 일
소나무의 사소한 흔들림으로 켁켁거려 주는 일
그러나 이 밤의 황홀한 순간이여,
죽음의 아가리에 발라 먹히는
고통의 위력을 빌려,
나 그대의 웃음소리로 잎새 우는
서러운 바람을 만들고
그대의 눈빛으로
교교한 달빛 한 올 만들어 냈으니
이 지상 가득히
내 사랑의 흔적 아닌 것 없지 않는가
땅의 목젖 내 한 몸으로
이다지도 울렁거리지 않는가

사랑은 우리 인간이 자기 수련을 통해 지향해야 할 최고의 경지이다. 그것이 우주, 아니 자연을 닮는 것이며, '하늘과 땅'의 뜻을 잘 받드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나? <성학십도>의 "서명"에서 퇴계 이황은 이렇게 말한다.

知化則善述其事, 窮神則善繼其志(지화즉선술기사, 궁신즉선계기지): 변화의 과정(化)을 이해(知)하면 즉(則). 아버지의(其) 사업(事)을 잘(善) 기록(述)할 수 있고, 자연의 신비(神)를 통찰(窮)하면 즉(則), 그(其) 뜻(志)을 잘(善) 완성(繼)할 수 있다. 참고: 지을 술, 이을 계이다.

자연의 신비를 한자 '신(神)'으로 보는 한형조 교수의 해석에 동의한다. 신은 인격적인 실체 라기보다, 우주의 원리이며 자연의 신비인, 비인격적 실체라고 본다. 제1도 "테극"에서 이황은 자연이 신이며, 거기 모든 길이 예비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화(知化)는 '변화를 이해한다'이고, 궁신(窮神)은 '신비를 통찰한다"이다. 선술기사(善述其事)는 '그 일을 잘 기록한다'이고, 선계기지(善繼其志)는 '그 뜻을 잘 이어 나간다'이다.

우리가 우주, 하늘과 땅,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잘 받드는 방법은 "아버지(하늘)의 사업은 우주의 과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변화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통찰하며, 삶을 완성시켜 나가라. 그것이 네게 주어진 책무'라는 것을 알고 매일 매일 수양(지기 수련) 하는 것이다.

이런 동아시아적 자연관이 서양의 근대 문명과 함께 자연을 도구로 인식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비대칭이 시작되었다. 자연을 신으로 경외하는 사고 사이에 깊은 심연이 파였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고, 그 역사의 협력자라는 것이 동아시아의 철학이다. 인간은 매크로한 우주의 일원으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통해 전체적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존재리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분절된 개인으로 의식하거나, 사적 관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시도는 전체 시스템의 조화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등장이 그 한 예일 수 있다. 그 대안은 자신의 본성(性, 才)를 잃지 않고, 그 의무와 책임을 꾸준하게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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