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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나는 '욜로 라이프'를 산다.

YOLO(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이다. "단 한번뿐인 인생, 나답게 잘 살자"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다.
그러면서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평생 생각만 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는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욜로 족의 첫 번째 일은 일의 총량을 줄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YOLO의 L자가 명사 라이프(Life)가 아닌 동사 리브(Live)여서 좀 더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인생 개념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행복의 내용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어야 한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이다." (헤르만 헤세)

여기서 행복이란 '지금', '여기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행복은 객관적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부처는 행복한 사람을 계/정/혜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했다. '계/정/혜'는 윤리적이고(계), 정신적 안정을 갖추고(정),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과 자비를 실천하는(혜)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그물망은 삶의 크나큰 전환을 시도하지 않는 한 속도와 경쟁, 적자생존과 양극화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아주 잘 '짜여진' 현실의 틀에서 우리의 꿈들은 모두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행복은 동사이어야 한다.

행복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과욕에서 소욕지족으로,
-경쟁과 대립에서 협동과 상생으로,
-획일과 차별에서 평등과 개성으로,
-목표와 욕망에서 의미와 나눔으로
-동상이몽이 아닌 동몽이상의 화엄세계로.

꿈도 동사이어야 한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 것이다.
꾼다고 하는 것은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우리의 꿈에 아름답고 지혜로운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주자.

목표가 곧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이다.
꿈이 수식어가 생략된 명사가 되면 삶이 건조하다.
꿈을 직업의 이름에 묶어두지 말자.
꿈에 형용사와 부사의 날개를 달아주자.
비겁한 학자보다 양심적인 학자를 꿈꾸자.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떠한 사람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욜로 라이프도 동사이어야 한다. 욜로 라이프는 '지금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번역보다는 '지금 이순간'이라고 피부에 와 닿는 뉘앙스이다. 단 한번 쁀이라면, 인생은 길고 준비할 것도 많다는 '라이프(Life)'의 뜻이 들어가 진부하다. 동사 '라이브(Live, 살다, 살아 있는)'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훨씬 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또한 '욜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욜로'는 지금 이 시간의 즐거움, 사랑, 교감, 행복 등 긍정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
'욜로'는 지금 이 시간의 고통, 미움, 반목, 불행 따위의 연결은 '욜로' 근처에도 갈 수 없다.

'욜로'의 주제는 '지금', '행복'이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욜로 라이프 추구한다. 왜? ' 살기 위함'이란다. 살기 위해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88만원 세대, 3포 세대, 흙수저, 금 수저 등 젊은이들을 우울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렇지만 절망하지 말고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라"고 격려한다. 구체성이 결여되고 다소 무책임한 발언일 수 있으나, 솔직히 부모 세대들은 그것 말고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욜로' 라이프의 추발은 '노답' 세상이다. 한 달 내내 일해서 딱 한 달 살 돈이나 그 이하만 번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욜로'란 이 답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다. 이마저 없으면 젊은이들은 숨막혀 줄을 것이다. 그렇다고 욜로라이프가 지금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모든 순간이 행복한 건 아니다. 다만 행복해지려고, 행복해보이려고, 힘들어 보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그래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불의를 보아도 화내지 않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웃는 얼굴로 대한다. 개념이 없어서가 ㅇ니라 행복해 지고 싶어서 그런단다.

그래서 욜로라이프를 위해서는 노는 것도 준비하고 배워야 한다. 계획없이 여행가서 되는 데로 돌아다니거나, 나이 먹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준비와 배움을 통해서, 일분일초 행복을 만나고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욜로라이프가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평범한 미래에 승부를 걸지 않는 것일뿐이다. 욜로라이프는 부모 세대의 죽기살기 라이프가 아니다. 욜로라이프는 욕심을 비우고, 최소의 삶을 살되, 오늘의 희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욜로라이프 세대는 주택 구입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다. 집 사서 집에 질질 끌려 다니는 비용으로 내 인생 빛나게 하는 일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욜로라이프 세대가 예상하는 미래의 세상은 0,1%의 초특급 부자와 약 5%의 부자와, 94,5%의 평범한 가난뱅이들로 구성된다. (부모 세대들은 부의 집중을 추구하는 정치 세력에게 표를 주는 역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현재 한국의 자영업 폐업률이 69,2%나 되는데...) 그래서 욜로라이프 세대는 정치적으로 진보정당을 응원하면서도 '지금 행복' 실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 현상이 '탕진잼 현상'이다.

이 현상은 남은 돈, 또는 탕진을 위해 모은 돈을 전부 탕진해 버리는 즐거움을 말한다. 말 그대로 재미 수준의 소비이다. 사실 쇼핑처럼 즐거운 일도 별로 없는 세상에서 탕진잼은 당장의 만족과 행복을 주기에 그만이다. 탕진잼을 즐기는 목적은 꽉짜인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다. 탕진잼은 궁극적으로 티끌모아 태산이 아닌, 티끌로 행복해지기를 추구하는 행동이 분명하다. 욜로라이프의 탕진잼은 결국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지 패가망신을 자처하겠다는 라이프 스타일은 아니다.

힘들어도 예산을 세워 각자의 즐거운 삶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 욜로라이프 세대의 철학이다. 기성 세대가 말하는 탕진은 도박이나 주색잡기로 탕진한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욜로라이프 세대들은 "몇 푼 남은 잉여 자금을 죄 날렸군"하며 웃어버린다는 것이다. 저축을 하든 빚을 갚든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지출을 한 뒤 어쩌다 소소한 돈이 남았을 때, 죽기살기로 저축을 하지 않고 단 30분에 소비해버리는 정도이다.

욜로라이프 세대들이 쓴 말에 '시발비용'도 있다. 시발비용이란 스트레스 풀기 위해 쓰는 돈을 말한다. 시발비용이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 예를 들어 스트레스 받고 홧김에 치킨 시키기, 평소라면 대중 교통을 이용했을 텐데 짜증이 나서 택시 타기 등"이란다. '홧김에 뭐 한다'는 옛말과 일맥상통하는 행위이다. 성질이 하늘을 찌르는데, 그냥 나를 방치할 수 없어서, 그러니 뭐라도 해야지, 뭐 할까? 에라 모르겠다!식이다. 다음말 후회할지언정, 지금 부글대는 내 심신을 진정시키는 일이 더 시급한 것이다.

'시발계'도 있다. 욜로라이프의 핵심인 '지금 행복', '지금 스트레스 지금 풀기'는 각자도생으로 하고, 1~2달에 한 번 계원들끼리 모여 합동 시발비용 탕진잼을 즐기는 것이다. 시발계원들이 모여 하는 일은 일상에서의 모임 기준보다 조금 더 호사스러운 편이다. 이 때 시발계언들이 꼭 챙기는 것은 예절이다. 자기 스트레스를 푼다고,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아한 삶의 대명사 미술관에서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인증샷을 남발해 가며 작품을 즐긴다. 미술관 화장실에서 메이크업 체크를 마친 시발계원들은 즉시 예약해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시그니처 메뉴들을 두루두루 주문해 조금씩 전부 맛 본다. 도한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며 그간의 스트레스를 발표하고, 그 스트레스를 준 상황을 저주하며 음식을 잘근잘근 십어먹는 것으로 캄캄했던 그 순간들을 떨쳐버린다. 시발계의 실세는 이벤트와 할인 행사에 능통한 인물이다. 그는 그 달 그 달 시발계원들의 '도를 넘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가장 핫한 코스를 가장 싼 가격으로 예약하는 사람이다. 대신 그에게는 회비 일부를 할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