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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실 지구 상에 잡초란 이름의 식물은 없다.

233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4월 27일)
요즈음은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매일 아침 일찍 내 채소밭에 나간다. 채소밭의 야채는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큰단다. 올해 씨앗을 뿌린 루꼴라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뽑으려 하니, 모두 잡초로만 보이더니, 품으려 하니, 모두 꽃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래도 올해는 어린 풀싹을 자초로 보고 늘 뽑는다. 그런데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은행을 세웠다는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 말했던 다음 말이 들여왔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잡초 생각만 하면 소환되는 시가 있다. 오늘은 그 시를 먼저 공유한다.
 
민지의 꽃/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인이 강원도 산골에 사는 제자의 집에서 얻은 모티브가 한 편의 시로 탄생한 것 같다. 1행과 2행은 그러한 사실의 진술이다. 독자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설처럼 발단부에 인물을 소개한다. 바로 3행과 4행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다섯 해를 살아온 민지이다. 5행부터 12행까지가 민지의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고 이 부분이 바로 핵심사건이다. 시인의 눈에는 민지가 가지고 온 물뿌리개가 ‘저보다 큰’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민지의 부모가 사용하는, 커다란 물뿌리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지가 물을 주고자 하는 대상은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들이다. 시인은 그 풀들의 이름을 안다. 그러니 시인의 의식 속에는 그런 풀들에게는 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민지는 물을 준다. 게다가 "잘잤니"라는 인사까지 한다.​ 시인이 물어보려 한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그건 잡초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잡초야"라는 뒷말이 나오기도 전에 민지의 답이 이어진다. "꽃이야"라고. 민지는 확신하고 있고, 그들이 꽃이라는 사실에 털끝만큼도 의심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빨리 답이 나온 것이다.​
 
시인은 "그건 잡초야"라 말하려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왜냐하면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음에도 시인에게는 그들이 한낱 잡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의 이름을 모르는 민지는 그들을 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13에서 16행까지 시의 마지막은 시인의 부끄러운 깨달음이다. 시인의 말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이름을 알면서도 내뱉으려 했던 "잡초야"라는 말에는 진실과 순수가 사라지고 시인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때가 묻은 것이다.​ 그에 비해 민지의 "꽃이야"라는 말에는 진실과 순수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민지에게는 그 풀들이 그냥 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민지의 순수한 마음이고 진실이다. 그렇기에 민지의 말은 풀들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울 수 있고, 풀잎으로 대표되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흔한 데다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 하지만 어린 민지는 잡초를 인격체로 대한다. 민지가 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평생 언어를 다뤄온 시인에겐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처럼 여겨졌을 테다. 말이 말 다울 때 말은 ‘천지와 귀신’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말에 ‘때’가 묻으면 말은 인간과 천지자연 사이를 갈라놓는다. ‘때 묻은 말’은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 자신 사이에도 금이 가게 만든다. ‘민지’가 산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지의 ‘꽃’은 우리 유전자 안에 다 있다. 우리가 물을 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원초적 감성을 되찾는다면, 말이 말다워지고 세대와 세대, 인간과 천지자연이 다시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없거나 있는, 혹은 사소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된다. 잡초로 인식하면 한낱 잡초일 뿐이지만 꽃으로 인식하면 그것은 내게 꽃인 것이다.​ 사실 지구 상에 잡초란 이름의 식물은 없다. 다만 우리가 그 식물의, 풀의 이름을 모를 뿐이다. 그렇게 이름 모를 풀들을 우리는 잡초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정말 잡초일까? 내가 이름을 몰라서 잡초일 뿐 그 풀들은 모두가 다 이름이 있다. 이름을 알면서도 잡초라 인식한 시인,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라는 이름 대신에 꽃으로 부른 민지. 잡초와 꽃의 경계는 바로 그런 인식의 차이이다. 시인은 그저 민지와의 일화를 그대로 전하며 자신의 때묻은 생각들을 질책한다. 일찍이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의 어른의 선생’이라 했듯이, 순수(純粹)한 사고(思考)가 무엇인지를 시인과 독자들은 민지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된다. 주변에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자리를 가리지 못해 뽑히어 버려져야 할 삶을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 나는 타고난 나 자신 만의 아름다운 자질을 맘껏 펼치면서 "들풀" 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산삼이라도 잡초가 될 수 있고, 이름 없는 들풀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요원으로 근무하는 분 중에서 인사도 잘하고 밝은 표정으로 근무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뭔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근무하는 분도 있다. 본인은 전직이 화려해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보 잘 것 없는 자리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감사하게 일하는 사람은 고귀한 분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자리에 앉았다 해도 잡초와 같아서 뽑힘을 당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 내가 있는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즈음은 매일 만보 걷기를 한다. 가끔은 걷다가 유튜브를 통해 시 낭송을 듣는다. 거기서 만난 시이다. 나도,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홀로 굳세고 자유롭게 설 수 있다면/차라리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다짐했던 적이 있다.
 
 
나만의 생/훌리오 노보아 폴란코
 
그대들은 꽃처럼 살아라
사람들이 항상 물 주고 보살피고 찬양해주지만
한낱 화분에 매인 운명이 되어라
나는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독수리처럼 절벽에 매달려
높고 거친 바위들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리라
돌 껍질 뚫고 나온 생명으로
광활하고 영원한 하늘의 광기에 당당히 맞서리라
 
시간의 산맥 너머, 또는 경이의 심연 속으로
내 영혼, 내 씨앗을 날라주는
태곳적 바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리라
 
차라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리라
모든 이가 피하는 잡초가 되리라
 
달콤하고 향기로운 라일락 향 대신
차라리 퀴퀴하고 푸른 악취를 풍기리라
홀로 굳세고 자유롭게 설 수 있다면
차라리 못생긴 키다리 잡초가 되리라
 
 
우리 대부분은 "한낱 화분에 매인 운명"처럼 산다. 그러니까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이들도 있다.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살라고 한다.
 
"독수리처럼 절벽에 매달려/높고 거친 바위들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리라.
돌 껍질 뚫고 나온 생명으로/광활하고 영원한 하늘의 광기에 당당히 맞서리라.
시간의 산맥 너머, 또는 경이의 심연 속으로/내 영혼, 내 씨앗을 날라주는/태곳적 바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리라."
 
삶이 주는 고통에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만나자는 거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의 손에 결국 뽑히고 마는 좋은 향을 풍기는 꽃이 되기 보다, "차라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모든 이가 피하는 잡초가 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롭고 싶다는 거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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