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인생은 누구에게나 사적(私的)이어야 한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정성스럽게 하고 싶어서 무슨 일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나를 만들 때, 그런 헌신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간결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커왔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해야 하는 재미가 없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신나는 일'을 교육을 통해 세뇌를 받으며 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완수해야 할 한 가지 고유한 임무가 있다. 나를 가만히 살펴보는 고독을 통해, 그 임무를 터득하고, 아니면 스승을 통해 지도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동료들과의 경쟁 속에서, 자발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일보다는, 부모와 친구들이 좋아하고, 대중이 흠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직업을 선택하여 인생을 보낸다.

만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의도적인 일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신명(神命)도 창의성도 없다. 신명을 깊은 몰입을 통해 들리는 신의 목소리이고, 창의성은 온전한 집중을 통해 등장하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것만이 내 관심이다.

배철현 교수는 좋은 예를 들었다. 자전거를 새로 사면 갑자기 같은 브랜드의 자전거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은 며칠 안에 그날 외운 단어를 길가의 간판이나 영화 등에서 마주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마법,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아는 것을 본다. 그래 많은 경험을 통해 알아차림의 지평을 확장하고, 그리고 체험을 통해 자신의 감각의 지평을 넓혀야 세상이 크게 보인다. 우물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제는 흥미로운 책을 한 권 만났다. 일본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가 쓴 『슬로 이즈 뷰티풀』이라는 책이다. 다음과 같은 멋진 말에 끌렸다. "작은 꽃을 보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친구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원래 인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 그리고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남들이 조절하는 속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만의 보폭으로 느리게 가자고 독려하는 책이다. "좀 더 천천히(not so fast)", 코로나-19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성장의 한계를 깨닫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목적도 방향도 지향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자신들을 특별한 생명체로 여겨 마지 사는 것에 목적이 있어야 하고 방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여러 생명들이 서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생명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은 순환할 뿐, 어느 한 곳을 지향해가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그냥 있으면서 현재를 살며 삶을 영위해 갈 뿐이다. 거기에는 목적도, 시작도 끝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도 없다. 고라니와 공존하는 길, 나보다 더 힘든 이웃과 함께 사는 길을 찾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