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글입니다.
밤새 강한 비바람이 불은 흔적이 널려 있는 동네를 오후의 맑은 햇볕을 즐기며 한 바퀴 돌은 후, <세월호> 참사로 서글펐던 2년 전 오늘을 생각하며
새로운 교육문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호 참사에서 학생들이 희생당할 때, 그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따르다 당한 그들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교육문법은 ‘능력주의’였다. 인간의 좋은 품격이나 좋은 삶에 대한 성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점수를 올리는 기법에만 몰두하는 문법의 신념체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은 이 문법에 의해 오랜 시간 누적되어 만들어진 교육적 왜곡이 낳은 참사이다. 더 이상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려면 교육이 목적과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교육은 1990년대 이후 ‘훌륭한’ 사람(자기를 희생하며 국가나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의 실체가 문제였다. 행복의 내용이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큰 집은 필요 없어, 적당히 30평짜리. 좋은 차 필요 없어, 3,000cc.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냐. 일 년에 한 번 해외여행 다녀오는 정도면 돼.” 이 말을 잘 들여다보면, 이 행복은 우리 사회에서 고용의 불안이 전혀 없고 수입이 상당히 보장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잇는 삶이다. “소박하다고 말하는 그 삶을 누리기 위해서 엄청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은 탈락한다. 계속 결핍만 확인하며 자존 감을 잃게 된다. 이게 잔인하다.”(이수광)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무히카는 말한다.
우리는 오로지 소비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더 이상 소비할 수 없게 되면
좌절감을 느끼고 가난을 괴로워하며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가난한 사람이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살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농부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렇다.
인생은 기적이다.
인생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은 언제나 혁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총과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다.
'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을 보는 방식 (0) | 2021.04.18 |
---|---|
남과 더불어 산 것이 남는다는 데. (0) | 2021.04.17 |
기억과 행동 (0) | 2021.04.16 |
비의 나그네 (0) | 2021.04.15 |
가장 힘든 일이 옳은 길이다. (0) | 2021.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