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박달재 다녀온 이야기를 할 새가 없었다. 연초부터 미루고 미루다 지지난 주 일요일에 다녀왔다. 가면서,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를 불르투스(Bluetooth)로 연결해 차 안에 울리게 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
이 노래에 나오는 "물항라 저고리'는 '물들인 항라로 지은 저고리"라고 한다. 항라는 반투명에 가까운 얇은 옷감이어서 비에 젖은 물항라 저고리는 한사코 우는 금봉이를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그리고 왕거미가 집을 짓고, 부엉이가 울고, 도토리묵을 싸고, 성황님께 비는 등 그 서사적 표현이 박달재의 애달픈 사연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이 노래가 없었다면 박달재의 슬픈 이야기는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고갯마루 문화도 사라지고, 주막 문화도 없어진 지 오래다. 더구나 터널이 뚫린 뒤로는 자동차로 박달재 밑의 땅 속을 질주할 뿐 이 고개에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선과 속도라는 효율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갯마루의 곡선과 주막 문화의 여유는 사라지고 있다. 나는 지난 주말에 서울에서 내려 온 일행들과 충청의 알프스 청양을 가면서, 공주 연미산 밑의 터널이 아니라, 연미 고갯길을 택하였다. 그곳에 가면, 공주 곰나루의 전설이 시작되는 '곰 굴'이 있고, 그 주변에 연미산 자연미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설치 미술들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설치 미술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곰나루는 웅녀가 나무꾼을 기다리고 있는 나루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공주에 가면 여기 저기서 '고맛나루'라는 이미지를 만난다. 곰나루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공주를 백제 세대에는 웅진(熊津)이라 하였다. 곰나루 전설은 안내판 적힌 이야기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것을 말해 본다. 웅녀가 잘생긴 나무꾼을 납치해서 무거운 바위로 가로막은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둘 사이에서 아이를 얻자 잠시 마음을 놓은 웅녀가 문을 닫지 않고 나간 사이 나무꾼이 도망을 간다. 그러자 웅녀는 아이와 함께 강에 몸을 던진다. 그 후로 금강에 홍수가 나는 등 잦은 사고가 발생하고 고기도 잡히지 않자 사람들이 곰의 넋을 기리고자 제사를 지냈더니 평온 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로 곰사당을 지어 해마다 그 넋을 기렸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고갯마루 이야기들이 사라진다는 박달재 이야기를 하려 다가 딴 길로 빠졌다. 서울서 온 일행들은 내가 터널로 가지 않고, 고개를 고집했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천둥산 울고 넘는 박달재" 이야기로 돌아 온다. 그 고개가 있는 곳은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잇는 해발 435미터의 고갯마루로 '문경새재'와 함께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의 글씨는 고 신영복 선생이 쓰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고개를 가기로 마음 것은 신영복 선생의 『변방을 찾아서』란 책을 보고, 이 곳에 나오는 곳들을 직접 가보고자 연초에 정했던 것이다. 좀 솔직히 말하면, 그 장소보다는 그 장소들이 품고 있는 '변방성'을 내 남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싶은 것이었다. '변방성' 이야기는 다른 날 아침 글쓰기로 넘긴다.
박달재에 오른 그 날도 사람들은 없고 바람만 세게 부는 데, 스피커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무한 반복으로 흘러 나왔다. 그 애달픈 사연은 운명 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운명 같은 죽음으로 비어지는 비극적 서사이다. 아름다운 재회를 기약했건만 과거시험에 낙방한 박달은 면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한다.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 온 박달 역시 금봉이의 환영을 쫓아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슬픈 순애보(殉愛譜)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모과나무가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 이유를 상상하는 것처럼, 박달이 과거 시험에 합격했더라면, 금봉이가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혹시 박달이 낙방했더라도 바로 금봉이를 찾아왔더라면 등등 여러 이야기들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별의 슬픈 서사들이 사라지는 시대에 좀 한가한 방학의 틈을 타, 잃어버린 따뜻한 정서를 다시 찾아 보고 싶었다. 요즈음 서사에는 더 이상 비련(悲戀)이 없다. 한사코 우는 금봉이는 더 이상 없다. 더 멋진 사람 만나 너를 후회하게 만들어 주거나, 네가 망가지라고 빌고 빈다. 사랑이 뜨겁지 않고 차갑다. 차가운 감성으로 아픔과 좌절마저 단단한 껍질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정직한 정서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 메말라 가는 따뜻한 정서를 유지하자고, 나는 인문운동가로 나서서 아침마다 글 한 편을 쓰고, 시 한편을 읽으며 공유하고 있다.
모과나무/안도현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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